“누구 짓이냐 … 못 믿겠다” 벽 내리친 볼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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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사인 볼트가 28일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 남자 100m 결승전에서 부정 출발로 실격된 뒤 라커룸에서 고개를 숙인 채 괴로워하고 있다. [신화사=연합뉴스]


2008년 5월 31일 미국 뉴욕 아이칸 스타디움에서 벌어진 국제육상경기연맹(IAAF) 리복그랑프리 100m에서 9초72의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혜성처럼 등장해 단숨에 단거리 황제 자리에 오른 우사인 볼트(25·자메이카). 그는 대구에서 생애 첫 굴욕을 맛봤다. 스타트가 늦다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우승을 독차지하고 세계기록까지 갈아치운 볼트의 부정 출발로 인한 실격은 뜻밖이었다.

우사인 볼트(자메이카)가 28일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 남자 100m 결승에서 부정 출발한 뒤 웃통을 벗고 안타까워하고 있다. [연합뉴스]

볼트는 28일 대구 스타디움에서 열린 남자 100m 결승에서 출발 총성이 울리기도 전에 스타팅블록을 박차고 나갔다. 볼트는 몇 걸음을 떼기도 전에 자신이 부정 출발한 사실을 인식했다.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두 손으로 유니폼 상의를 벗어 던진 그는 하늘을 바라보며 머리를 감싸쥐기도 했다.

 볼트는 믿기지 않는 듯 허탈함을 이기지 못했다. 경기장 벽을 양손으로 내리치고 통로 가림막에 머리를 기대는 등 끓어오르는 분을 삭이지 못했다. 전광판에 자신의 실격처리가 공식 발표되자 손을 저으며 “누구 짓이야(Who is it?)”라고 외치는 장면이 고스란히 방송 전파를 타기도 했다.

 숨죽인 채 지켜보던 관중도 경악했다. 부정 출발을 알리는 두 번째 총성이 울리자 ‘설마’ 하는 표정으로 웅성거리던 관중도 볼트의 실격판정이 나오자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실망감을 나타냈다. 상황을 복기하면 예선부터 볼트는 여러 가지 불길한 모습을 보였다. 과도하게 제스처를 취할 때부터 어색해 보였다. 액션이 그렇게 큰 것은 스스로 뭔가가 좋지 않다는 느낌이 들어서였으리라.

볼트는 몸상태가 정상이 아니었고 바로 옆에서 뛰는 요한 블레이크의 성적이 좋아 부담감을 가졌을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도 정상을 지켜야 한다는 게 더 어깨를 짓눌렀을지 모른다. 2010년부터 한 번의 부정출발로 바로 실격되니 선수들의 부담감은 예전에 비해 더욱 커졌다. 볼트가 이 모든 상황에 대한 부담감을 미처 이겨내지 못했으리라는 분석이 가능하다.

 준결승까지 볼트는 예년에 비해 반응속도가 많이 향상된 모습을 보였다. 초반 스타트 이후 허리를 숙이고 30m까지 질주해 나오는 동작도 좋아졌다. 발을 뒤로 감아채는 동작도 한결 깨끗해졌다. 반면 근력은 세계신기록을 낼 당시와 비교해 떨어졌고 스트라이드도 작아진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부상 이후 훈련이 부족했던 여파가 있었을 것이다. 준결승 기록이 10초대에 머문 것도 뭔가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신호였을지 모른다. 100m 실패는 남은 경기에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 200m에서 100% 경기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아사파 파월이나 타이슨 게이 등 강력한 경쟁자가 안 나와 편하게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볼트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것으로 보인다. 볼트는 인터뷰도 거절하고 경기장을 떠나 곧장 숙소로 돌아갔다. 숙소로 돌아가는 차안에서 넋 나간듯 "믿을 수 없다(I can not believe)”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대구=김종력 기자, 백형훈 본지 객원전문기자

◆스트라이드=보폭을 말한다. 넓은 보폭으로 달리는 것을 롱스트라이드(long stride), 짧은 보폭으로 달리는 것을 쇼트피치(short pitch)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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