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이상언 특파원 트리폴리 가다] “혁명은 내게 조국을 돌려줬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2면

“나는 나라를 위해 싸웠고, 혁명은 내게 조국을 돌려줬다.”

 리비아 ‘트리폴리 혁명 부대’ 청년병 무함마드 엘카타프(22·사진)는 자신감과 긍지에 가득 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수도 트리폴리 래디슨 호텔 앞에서 “자유 리비아에 온 것을 환영한다”며 말을 걸어 왔다. 매끄러운 영어 발음과 준수한 용모에 시선이 끌렸다. 과도국가위원회(NTC) 고위 관계자와 외신 기자들이 묵고 있는 호텔 앞에서 소총을 들고 경비를 서고 있던 중이었다.

 그는 자신을 ‘프리덤 파이터(자유 전사)’라고 소개했다. 청년 시민군들이 스스로를 일컫는 유행어다. 그는 3월 내전이 시작되기 전까지 트리폴리 알파타대 영어과 4학년 학생이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나 7년 전까지 그곳에서 살았던 미국 시민권자다. “민간 항공사 조종사였던 아버지가 은퇴하며 귀국해 리비아로 왔다”고 했다.

 그는 내전 발발 전까지 매일 미국으로 돌아가 미국인으로 살 것을 꿈꿔 왔다. “국민이 뽑지도 않은 사람(무아마르 카다피)이 수십 년간 통치를 하고 그의 아들과 딸들이 국가를 좌지우지하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경제적으로는 별 어려움 없이 생활해 왔지만 나는 이 나라를 사랑할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 엘카타프는 3월 말에 시민군에 가담했다. 평소 자신을 아들처럼 아껴준 5촌 당숙이 카다피 군의 총격으로 거리에서 숨진 것이 계기가 됐다. 난생 처음 총을 손에 쥔 것이었다. 그는 “이슬람 신자로서 가족과 이웃의 부당한 죽음에 항거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위야 등 트리폴리 인근 도시에서 카다피 군에 맞서 싸웠다. 23일 카다피와 가족의 은신처인 바브 알아지지야 요새 함락 전투 때도 참여했다. 그의 발목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당시 파편이 튀어 다친 것이었다. 그는 그동안 발밑에 떨어진 폭탄이 다행히 불발되고 총탄이 귀를 스치고 지나가는 등 여러 차례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고 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뒤 곧바로 미국에 가서 비행기 조종사 면허를 따 항공사에 취업하는 게 인생 계획이었으나 혁명으로 생각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현재 그의 장래 희망은 리비아 공군 조종사다. “시민군에 가담한 내 또래의 청년들과 함께 생활해 오면서 조국과 국민을 사랑하게 됐다”는 것이었다. “숱한 동료들의 죽음을 눈앞에서 지켜봤다. 그들의 뜻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고 마음 속으로 약속했다”고도 했다. 엘카타프는 “자원 부국인 리비아는 곧 아랍에미리트(UAE)보다 더 잘사는 나라가 될 것이다”. 그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이상언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