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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view &] 금융위기와 금융사 보신주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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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이철형
와인나라 대표

제지 설비 등을 만드는 M사. 1990년대 초 종업원수 30여 명에 연 매출 30여억원대에 불과했다. 그러다 4년 만에 종업원 300여 명에 연 매출 300억원으로 사세를 키웠다. 95년에는 코스닥 상장에도 성공했다. 하지만 곧 도산하게 된다.

 사연은 이렇다. 이 회사는 코스닥에 상장한 95년 국내 제지업체(製紙業體) P사로부터 기계 설비를 발주받았다. P사는 투자자금을 금융회사에서 빌렸다. 이 과정에서 금융사는 P사에 추가 보증을 요구했다. 결국 기계를 납품하는 M사가 보증을 서게 됐다. 중소기업인 M사로선 ‘갑’인 발주처의 보증 요구를 무작정 거절하긴 어려웠을 게다.

 보증이 화근이 됐다. M사에 설비를 발주했던 P사가 부도났다. 못 받은 돈에 보증선 것 등등 해서 M사는 70여억원의 자금 부담을 떠안게 됐다. 그러던 차에 97년 말 외환위기까지 닥쳤다. 당시 이 회사는 300억원어치의 수주 잔액을 갖고 있었지만, 해외 발주처들은 무기한 발주를 미뤘다.

 금융회사들도 가세해 자금 회수 압박을 시작했다. 언젠 우량기업이라고 앞다퉈 “싼 이자로 돈을 꿔가라”며 부추기더니 태도를 싹 바꿨다.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고 했던가. 노사 갈등까지 겹쳤다. 감원 구조조정을 하려 했지만 노조의 완강한 반대에 부닥쳤다. 외부 세력까지 개입해 노사 갈등의 골은 더 깊어졌다.

 99년 M사는 결국 부도가 났다. 부도 이후에도 M사는 기구한 운명을 겪었다. 우여곡절 끝에 회사 오너가 바뀌었지만 종업원들은 대부분 이미 떠나간 뒤였다.

껍데기만 남은 이 회사는 증권시장에서 ‘머니게임의 도구’로 전락했다. 인원 감축 반대 목소리를 내던 종업원들은 대부분 강제 해고됐다.

 지나서 하는 얘기지만 만약 제때 합리적인 선에서 인원 감축이 이뤄졌다면 어땠을까. 세계시장에서 기술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던 만큼 어떻게든 위기를 넘기지 않았을까. 이에 더해 ‘금융회사들이 300억원대에 달하는 수주잔액 등을 헤아려 돈줄을 죄지 않았다면’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새삼 M사의 얘기를 하는 이유는 국제 금융시장의 불안정이란 작금의 경영 환경이 90년대 말 외환위기(外換危機) 때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아서다. 이럴 때 M사처럼 노사 간의 불신과 금융사의 무차별적인 자기 보신주의가 닥쳐온다면 어떤 기업도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 같은 때, 우선은 기업 내부적으로 노사 불신이 없어야 한다. 사업주는 자신의 근로자를 파트너로 인정해야 한다. 근로자 역시 사업주의 경영적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 물론 사업주의 도덕적 해이가 문제라면 근로자가 나서야 한다. 하지만 인원 감축이 회사 존망의 결정적 요인이 되는 상황도 있다는 점을 근로자는 인정해야 한다. 이에 앞서 위기를 맞아 감원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사업주가 사전에 최선을 다해야 함은 물론이다.

 금융회사 쪽에 당부하고 싶은 말도 있다. 최근 동반성장 목소리가 거세다. 전통적인 ‘갑-을’ 관계에서 갑이 일방적인 이익을 취하지 말자는 게 골자다.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M사처럼 ‘울며 겨자먹기’로 갑의 부당한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는 게 기업 현실이다. 이런 때일수록 금융사들이 나서줘야 한다. 적어도 거래 관계에서 ‘갑’의 위치에 있는 기업들이 ‘을’인 중소기업을 쥐어짜 보증을 서게 하는 일이 없도록 대출 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 채권회수 역시 좀 더 과학적이었으면 한다. 해당 기업의 생존 가능성을 꼼꼼히 따지는 일은 아직도 요원하다.

 다시 회사 내부 얘기다. 조직 내 의견이 통합돼도 살아남기 힘든 게 요즘 경영 환경이다. 조직 전체가 하나가 돼도 금융기관 같은 외부 관계자들은 쉽게 도움의 손을 내밀지 않는다. 하물며 자중지란의 상태에 이른 회사는 말할 것도 없다. 노사를 떠나 같은 회사를 다니는 동료끼리 스스로의 밥그릇을 깨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이철형 와인나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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