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 버린 아포테커, 시장도 그를 버리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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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지난해 9월 30일 세계 최대 PC제조업체인 미국 휼렛패커드(HP)는 월가를 깜짝 놀라게 했다. 성추문으로 물러난 마크 허드 최고경영자(CEO)의 후임으로 세계 최대 비즈니스 소프트웨어 제조업체인 독일 SAP의 CEO 레오 아포테커(Leo Apotheker·58)를 영입한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아포테커는 1988년 SAP에 입사해 20년 만에 CEO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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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프랑스와 벨기에에 SAP 지사를 세운 뒤 프랑스 정보기술(IT) 혁신을 선도한 공로로 2007년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를 받기도 했다. 유대인으로 독일기업 CEO에 오른 것도 그가 두 번째였다. 폴란드계 유대인이었던 그의 부모는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폴란드를 탈출했다가 전쟁이 끝난 뒤 독일에 정착했다. 월가도 HP의 선택을 환영했다. HP 주가는 그가 CEO에 취임한 후 넉 달 만에 17%나 뛰었다.

 그러나 1년도 안 돼 그에 대한 시장의 신뢰는 곤두박질했다. 급기야 지난 18일(현지시간) 그가 PC사업에서 손 떼고 스마트폰·태블릿PC 생산을 중단하며 영국의 기업용 정보분석 소프트웨어 회사 오토노미를 102억5000만 달러에 인수한다고 발표하자 투자자의 불만이 폭발했다. 19일 하루에만 HP 주가는 20%가 추락해 6년 만에 최저가로 주저앉았다. HP 주식을 120만 주 보유하고 있는 오리건주의 베커 자산운용의 팻 베커는 “아포테커가 입만 열면 주가가 빠진다”며 노골적으로 그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다. 일각에선 경영진 물갈이 필요성이 거론되기까지 했다.

 지난해 HP가 아포테커를 영입한 데는 나름의 고민이 있었다. 2001년 세계 3위 PC제조업체였던 HP는 1위 델과 맞서기 위해 2위 컴팩을 250억 달러에 인수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여기다 지난해엔 세계 최초 스마트폰 제조업체 팜을 12억 달러에 인수하며 스마트폰과 태블릿PC 시장에도 뛰어들었다. IBM이 2005년 PC사업을 중국 레노보에 팔아 치운 것과 반대로 HP는 PC사업에 더 깊숙이 발을 담근 셈이었다. 그러나 HP는 델과의 싸움에서 이기기는커녕 애플이라는 더 무서운 적을 만나 고전했다. PC사업이 계륵과 같은 존재로 전락한 것이다.

 개인고객을 주로 상대한 HP가 기업고객 전문가인 아포테커를 영입한 건 이 같은 상황에서 탈출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아포테커는 CEO에 취임하자 HP의 사업구조를 다시 짜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도 처음엔 PC사업부를 선뜻 포기하지 못했다. 내부 반발도 컸다.

 월가의 평가는 엇갈린다. 그가 PC사업에서 발을 빼기로 한 것에 대해선 지지 의견이 훨씬 많다. 그러나 PC사업부 분사를 서둘러 발표해 버린 것에 대해선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HP의 PC사업에 관심 있는 인수 후보자끼리 경쟁을 시켜 몸값을 높이는 전략을 스스로 포기해 버렸다는 것이다. HP로선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 규정상 이를 공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해명하고 있지만 투자자로선 아쉬울 수밖에 없다. 연 10억 달러 매출액을 올리는 오토노미를 100억 달러가 넘는 가격에 인수하기로 한데 대해서도 시장의 시선은 곱지 않다. 다급해진 아포테커는 22일 뉴욕에 이어 24일 런던으로 날아가 주주 설득에 나설 예정이다. 그의 행보가 주가 추락을 멈출 수 있을지 미지수다.

뉴욕=정경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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