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철호의 시시각각

영혼 없이 육체로만 버티는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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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철호
논설위원

지난주 ‘S급 천재를 걷어찬 삼성’이란 칼럼에서 제 발로 찾아온 ‘안드로이드의 아버지’ 앤디 루빈을 놓친 삼성의 일화를 소개했다. 이 글에 klarheit란 네티즌이 인상적인 댓글을 올렸다. 그는 “한국의 S급 인재는 SKY대에다 번듯하게 생겨야 하고, 성격 좋아야 하고, 말 잘 들어야 하고, 눈치 빨라야 하고, 웃는 인상의 둥글둥글한 사람들 중에서 골라내는 게 아니냐”고 반문한다. 이어 만약 세계를 주름잡는 걸출한 경영자들이 한국 기업에 입사 원서를 냈다면 어떻게 됐을지 꼬집는다.

 “빌 게이츠(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스티브 잡스(애플 CEO), 마크 저커버그(페이스북 창업자)=대학 중퇴자들로서 서류전형에서 탈락. 앤디 루빈=듣보잡 대학(미 Utica칼리지) 출신이라며 역시 서류전형 탈락. 세르게이 브린(구글), 래리 페이지(구글), 엘론 머스크(스페이스엑스 CEO)=멀쩡하게 다니던 명문(스탠퍼드) 대학원을 왜 그만뒀나. 끈기가 없어 야근 못 한다며 1차 면접 탈락. 네이선 미르볼드(인텔렉추얼 벤처스)=스펙은 맘에 드는데 왜 요리에 미쳤느냐며 조직 부적응을 우려해 심층면접 탈락….”

 과연 우리는 이런 비아냥에 “아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어떤 지원자든 탈락시킬 구실은 500가지 이상 나온다.(좋은 기업의) 핵심은 그 사람을 뽑을 단 한 가지 이유를 (어떻게) 찾아내느냐다”라는 그의 따끔한 충고가 가슴을 찌른다. 한국은 스펙으로 사는 나라가 된 지 오래다. 대학생들은 창의성(創意性)과 담 쌓고 자격증 시험과 성형수술에 매달린다. 취업 게시판마다 “지잡대(평범한 지방대) 출신, 학점 3.4, 토익 800점, 제가 대기업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라는 불안한 질문이 넘쳐난다.

 그제 구글이 125억 달러에 모토로라를 접수했다.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안드로이드 진영의 승리”라고 만세를 불렀다면, 순진한 생각이다. 구글은 자선사업하는 곳이 아니다. 아직 돈도 안 되는 안드로이드 특허를 지키려고 이 엄청난 도박에 나섰을 리 없다. 구글이 노리는 상대는 애플임이 분명해 보인다. 애플은 하드웨어+소프트웨어+콘텐트의 삼박자를 갖추고 돈을 그러담고 있다. 지난 2분기 세계 휴대전화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5%에 그쳤지만, 전체 수익의 66%인 80억 달러를 독차지했다. 애플의 폐쇄적인 생태계와 높은 고객충성도의 승리다. 이런 노다지 시장에 구글이 군침을 삼키지 않을 리 없다.

 당분간 한국은 안드로이드의 우산 속에 안주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구글이 소프트웨어(SW)와 하드웨어(HW)의 양 날개를 달면서 안드로이드의 중립성은 훼손되기 시작했다. 유료화는 시간문제로 보인다. 다음 달에는 마이크로소프트가 노키아와 손잡고 망고를 선보인다. 세계 정보기술(IT)의 판도가 삼등분될 조짐이 뚜렷하다. 한국 업체들이 독자적 생태계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IT 삼국시대에 찬밥 신세가 되기 십상이다. 자칫 미국판 춘추전국시대에 우리 모바일의 운명을 맡겨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애플의 성공신화도 시작은 미약했다. 2001년 갓 들어온 계약직 직원과 입사 5년차의 신출내기가 머리를 맞대 아이팟을 만들었다. 뛰어난 스펙이나 전용기로 모셔온 S급 인재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영혼(소프트웨어) 없이 육체(하드웨어)로만 용케 잘 버텨왔다. 드디어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우리도 구글처럼 소프트웨어 업체를 합병할 수 있다”고 승부수를 던졌다. 더 이상 영혼 없이는 IT전쟁에서 승산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면 운명을 쥔 인재가 우리 주변에 숨어있을 수 있다. 스펙과 연줄에 질식당해 눈에 띄지 않았을 뿐인지 모른다. 경제도 결국 사람이다. 스펙만으론 감당하기 힘든 싸움이 몰려오고 있다. 인재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각부터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참고로, 지난해 토익·토플 시험으로 빠져나간 돈이 2000억원에 이른다. 세계화의 잣대로는 반가운 소식일지 몰라도 창의성 측면에선 정말 비극적인 통계다.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