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리포트] 현대판 ‘자박마니’ 러시 … 뒤늦게 뛰어든 한국은행도 4000억 대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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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1. 16일 낮 12시 서울 종로3가 귀금속 거리. 길 따라 줄지어 있는 귀금속 상가는 텅 비어 있다. 가끔 연인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매장 문을 기웃거리며 문의할 뿐 대부분 직원 혼자 매장을 지키고 있다. 일부 매장은 아예 문을 닫기도 했다. 이곳에서 10년 넘게 귀금속 매장을 운영했다는 한 상인은 “가장 저렴한 귀걸이마저 찾는 사람이 없다”며 “금 거래가 완전히 얼어붙었다”고 말했다. 그는 “금값이 오름세인 데다 최근엔 부자들이 금을 대량으로 사들이고 있어 소량으로 금을 사는 사람은 더욱 줄었다”고 말했다. 금 매입상도 한산하긴 마찬가지다. 매입상 이모씨는 “금값이 올라 집안에 있던 금붙이를 내다 파는 사람이 늘긴 했지만 급증하진 않았다”며 “정작 금을 대량으로 보유한 부자들은 금을 팔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2. 같은 날 오후 서울 삼성동 신한은행 봉은사로 지점. 정유경(31) 과장은 고객에게 금 상품을 설명하느라 바쁘다. 방문 고객에게 설명을 하고, 전화 문의하는 고객도 응대하는 식이다. 정 과장은 “‘골드리슈’(금 통장) 같은 금 관련 상품 문의가 지난달에 비해 2~3배가량 늘었다”고 말했다. 골드뱅킹을 담당하고 있는 신한은행 본점 상품개발부 문성원 과장은 “위험자산을 회피하고 안전자산을 선호하는 현상이 맞물리면서 금 수요가 많이 늘었다”고 말했다. 이 은행의 금 통장 잔액은 1월 초 3916㎏에서 12일 6043㎏으로 54% 늘었다. 같은 기간 원화 환산액도 2009억원에서 3700억원으로 84% 급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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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을 찾는 도시형 ‘자박마니’가 늘고 있다. 자박은 생금(生金)을 뜻하는 우리말 ‘자박’에 사람을 가리키는 ‘마니’가 붙은 말이다. 세계 금융시장이 혼란에 빠지면서 대표적 안전자산인 금으로 사람이 몰리고 있다. 15일(현지시간) 금값(12월 인도분)은 전날보다 15.40달러(0.9%) 오른 트로이온스당 1758달러에 거래를 마감했다. 금값은 지난 일주일 동안 5.5% 올랐으며 올 들어 23% 이상 상승했다. 금값 급등 덕에 한국은행이 지난달 초 1조3000억~1조3500억원에 구입한 금 25t의 가치도 1조7000억원대까지 상승했다.

 금값이 뛰자 개인은 금을 직접 사거나 투자하려 나선다. 기업은 금을 더 캐기 위해 폐광까지 뒤지고 있다. 개인이 금을 찾는 방식은 재산 상태에 따라 다르다. 부유층에서는 직접 금을 소유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많다. 돈이 넉넉하지 않은 일반인은 금 관련 금융상품에 투자하기를 선호한다. 이 바람에 서민이 자주 찾던 귀금속 매장은 찬바람만 쌩쌩 분다.


 정태옥 신한은행 파이낸스골드센터 PB팀장은 “대체로 나이 많은 고객은 실물 금에 관심이 많고, 세금 부담 등을 고려한 중년층은 금 관련 금융상품에 관심이 있다”며 “금 가격이 크게 오르내리고 있기 때문에 많아야 자산의 10% 정도만 금에 투자할 것을 권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70대 고객은 100g짜리 금을 선호한다고 한다. 정 팀장은 “자식뿐만 아니라 손자 세대까지 생각하면서 상속·증여까지 고려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실물 금을 보유하려면 살 때 부가가치세 10%를, 살 때와 팔 때 매매수수료를 내야 한다. 그런데도 자산가들이 금을 보유하려는 이유는 뭘까. 임병효 삼성증권 투자컨설팅팀 연구원은 “고액 자산가에게 금은 증여나 상속 목적 외에 금융시장 혼란기에 심리적 안정을 주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개인은 팔 때 가격을 낮게 받고 보유하기 불편한 실물보다는 쉽게 현금화할 수 있는 금 통장이나 금 펀드 등 금융상품을 선호한다. 제로인에 따르면 이달 들어(1~11일) 순수 금 관련 펀드 11개에 110억원이 새로 유입됐다. 이는 7월 전체 유입액(22억원)의 5배를 넘어서는 것이다. 대부분의 금 펀드는 지난 일주일 동안 5~9%의 수익률을 올렸다. 올 들어 현재까지 주요 금 펀드의 수익률도 20%를 훌쩍 넘어선다.

 김경중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달러 가치가 하락세에 접어들 것이라는 전망에다 신흥국의 지속적 수요까지 고려하면 금과 같은 광물 값은 계속 오를 것으로 보인다”며 “전 세계적으로 금광이 줄고 있어 채굴 비용이 상승하는 것도 금값 상승을 부추기는 요인”이라고 말했다.

김창규·허진 기자, 박준규 인턴기자(서울시립대 경영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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