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탐방] 온양 힐스테이트 아파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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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정문 앞 165㎡의 텃밭에는 없는 게 없다. 파릇파릇한 상추, 알 굵은 열무, 싱싱한 깻잎, 매끈한 애호박. 아산에 있는 온양 힐스테이트 박규탁(74) 노인회장은 상추와 깻잎을 따기 바쁘다. 함께 팔을 걷어붙인 부녀회원들도 바쁘게 호미질을 한다. 어느덧 사람들의 손에는 깻잎과 상추가 가득하다. 이마에는 송글송글 땀이 맺혔다. 하지만 입가엔 웃음꽃이 피었다.

그들이 이렇게 땀 흘리는 이유는 텃밭에서 가꾼 채소로 아파트 노인들에게 식사를 대접하기 위해서다. 짜증날 법도 한 일을 웃으며 할 수 있었던 이유. 바로 여기에 있었다.

온양 힐스테이트 아파트 노인회, 부녀회 회원들이 아파트 정문 앞 텃밭에서 채소를 가꾸고 있다. 텃밭에서 자라는 채소는 농약 대신 주민들의 사랑을 먹고 자란 친환경농산물이다.

80세 언니 50세 동생이 허물없이 지내는 곳

8일 점심시간이 다가올 무렵 아파트 관리동 사랑방은 시끌벅적하다. 노인회, 부녀회 회원들은 텃밭에서 갓 뽑아온 채소로 식사 준비에 한창이다. 매주 월요일, 금요일에 하는 백세건강체조를 마친 아파트 노인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밥상은 많은데 앉아 있는 노인들이 별로 없다. 대부분의 노인회원이 부녀회원과 함께 삼계탕을 끓이고 밑반찬을 만들고 있었다. 윤전자(52) 부녀회원은 “노인회, 부녀회를 나누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며 “어르신들을 언니라고 부르며 정답게 지낸다”고 말했다.

“삼베 보자기에 쌀이랑 인삼, 대추, 밤, 마늘을 넣고 푹 쪄, 그걸 건져낸 후에 닭을 삶으면 금방 익고 나이 많은 분들 먹기에도 좋지.” 젊은 시절 식당을 했던 임재희(76) 노인회 부회장은 부녀회원들에게 자신만의 요리법을 전수한다. 손현순(48) 부녀회 총무는 “그는 우리에게 ‘요리왕’으로 통한다”며 “음식을 맛있게 만드는 비법을 가지고 있다”고 치켜세웠다. 이에 임씨는 “그저 음식 순서만 알고 있다. 함께 지내는 게 즐거워 음식을 만들 뿐”이라며 겸손해 했다.

주민 화합 활동 가득

아파트 주민들의 모임은 이뿐만이 아니다. 온양 힐스테이트 산악회는 아파트 입주와 동시에 결성됐다. 주민들간의 친밀감을 키우기 위해서였다. 얼마 되지 않던 회원은 5년이 지난 지금 60여 명으로 늘어났다. 조희자(58) 산악회장은 “함께 산을 오르면 금세 친해진다”며 “주민 화합도 되고 건강까지 챙길 수 있어 행복하다”고 말했다.

산악회는 인근 지역 산 뿐만 아니라 지리산, 속리산, 내장산 등 전국의 명산을 찾아 다녔다. 조씨는 “두 번 이상 간 산도 많다”며 웃음지었다. 72세의 김문자 산악회원은 지금도 산을 오른다. 김씨는 “산악회 활동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건강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단지 내에서도 주민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가득하다. 일주일에 두 번 ‘스포츠 댄스 교실’, ‘요가 교실’이 열린다. 아산시로부터 지원을 받아 모두 무료다. 20~30명이 참가한다. 특히 스포츠 댄스 교실은 중년부부에게 인기다. 수업을 받으며 잦은 스킨십을 하니 금실이 좋아졌단다.

수업이 진행되는 교실은 원래 입주자 대표 회의실이었다. 입주자 대표회가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 교실로 바꾼 것이다. 탁자, 책상, 사무용 서랍을 치우고 바닥에는 장판을 깔아 수업 환경을 만들었다.

폐지 모아 이웃 사랑 실천

김규환(69)씨의 선행은 30년째 이어지고 있 다. 교직에 몸담았던 김씨는 지체 장애 1급인 친구를 꾸준히 도왔다. 안쓰러운 마음에 시작했지만 중간에 끝낼 수 없었다. 폐지를 조금씩 모아 고물상에 판 돈으로 친구에게 40㎏ 쌀 포대를 사주고 점심을 사줬다. 반찬도 만들어 갖다 줬다.

일주일에 1만~1만5000원을 벌려고 오전 5시에 아파트를 돌았고 퇴근 후 2시간 동안 폐지를 모았다. 이를 알게 된 주민들은 자신의 집에서 생기는 폐지를 김씨에게 줬다. 올해 1월 폐암 판정을 받은 김씨는 “하나의 생명이라도 구하면 의미가 있는 일”이라며 “주위사람들도 봉사에 나서길 바라는 마음 뿐”이라고 말했다.

아파트 부녀회도 이웃사랑 실천에 적극적이다. 매해 ‘바자회’를 열어 모은 성금으로 차상위 계층에게 쌀과 라면을 전달한다. 김장철에는 김치를 직접 담궈 전달하기도 했다. 이춘희(49) 부녀회장은 “차상위 계층은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작은 도움이라도 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구절초 향기 나는 동네

주민들은 5년 전부터 아파트 화단에 구절초를 꾸준히 심어왔다. 특색있는 아파트를 만들기 위해 김경회(50) 입주자 대표가 의견을 냈다. 어느덧 아파트 전체 화단 면적(4248㎡) 중 3분의 1 이상이 구절초다. 장진금(47)씨는 “구절초는 꽃 모양도 이쁘고 향도 진하다”며 “아이들과 함께 산책을 자주 나온다”고 말했다.

이영석(47) 관리소장은 “주민들이 직접 화단을 가꾸었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며 “앞으로 주민들과 나리꽃을 심어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글·사진=조한대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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