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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속옷 광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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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아담과 하와가 인류의 첫 옷을 입기 시작한 이래 오랫동안 겉옷과 속옷은 구분되지 않았다. 속옷의 기능성이 확보된 것은 중세 이후였는데, 여성에겐 신체를 억압하는 수단으로도 쓰였다. 16세기 프랑스 인문학자 프랑수아 라블레는 판타지 풍속소설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이야기』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우리들이 집을 나설 때는 반드시 아내에게 벨가모식 자물쇠를 철커덕 잠근다.” 벨가모는 철제 또는 가죽으로 된 정조대를 다량 생산하던 이탈리아 지방 이름이다. 여성의 속옷을 벗길 권리는 열쇠를 쥔 남편에게 있었다.

 20세기는 집안의 여성을 해방시켰을 뿐 아니라 겉옷에 가렸던 속옷을 독자적인 패션 아이템으로 발전시켰다. 한국 여인들도 상류층을 중심으로 서양에서 들여온 브래지어와 팬티를 착용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맨살과 맞닿은 사치품을 드러내 놓고 과시할 순 없었다. 1960년대 비비안이 명동 매장에 속옷 상태의 마네킹을 전시하자 행인들이 망측하다며 피해 다녔다. 당시 잡지용 광고는 심의 기준인 ‘점잖은 표현’을 준수하기 위해 실물 대신 일러스트로 속옷 입은 여자를 보여줬다(『오리콤 30년 광고이야기』).

 실물 모델은 80년대 등장했다. 외국인 일색이었다. 국내 연예인은 이미지 훼손을 이유로 란제리 광고를 꺼렸다. 신체 보정 효과 측면에서도 외국인 모델의 볼륨감이 우선시됐다. 90년대 중반 이후 속옷의 ‘섹시 코드’가 강조되면서 란제리 광고는 국내 톱스타들의 경연장이 됐다. 김남주·송혜교·김태희·신민아·신세경·고소영·한예슬 등이 글래머 몸매를 과시했다. 한국 속옷 시장은 남녀 통틀어 1조4000억원 규모로 성장했다.

 광고업계는 톱스타의 속옷 광고를 ‘워너비(wannabe·유명인을 동경해 행동·복장 등을 따라 하는 것) 효과’를 노린 것이라고 말한다. 이 점에서 최근 비비안이 남자배우 소지섭을 란제리 모델로 발탁한 것은 파격이다. 광고대행사 대홍기획은 “‘저런 남자로부터 사랑받고 싶다’는 컨셉트의 광고가 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어떤 여자로 보일지에만 신경 썼던 속옷 광고가 잘난 남자를 선택하는 여자의 능동성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자는 남자를 통해 자신을 하나의 타자로 본다”는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지갑을 움켜쥔 현대 여성은 더 이상 ‘타자’가 아니다.

  강혜란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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