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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미당·황순원 문학상] 본심 후보작 지상중계 ④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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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시인 이기인씨는 “나는 머리로 늘 시상(詩想)을 녹음하고 다닌다”고 했다. 그만큼 그의 일상은 시와 밀착돼있다. 지난달 27일 본사 스튜디오에서 촬영.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시인 이기인(44)씨는 늦게 등단한 편이다. 서른셋이던 2000년 시인이 됐다. 하지만 2005년에 펴낸 첫 시집 『알쏭달쏭 소녀백과사전』이 일으킨 반향이 작지 않았다. 새로운 ‘공순이상(像)’의 창조랄까. 공장 여공들이 처한 척박한 작업환경이나 결코 순진하지 않은 여공들의 불온한 내면 같은 것들을 인상적으로 그려냈다. 이런 작업에 대해 문학평론가 최원식씨는 “공장 여성노동자들을 ‘소녀’로 바꿔 부르며 해석 변경을 시도해 한국시의 새로운 풍경을 열었다”고 평한 바 있다.

 지난해 출간한 두 번째 시집 『어깨 위로 떨어지는 편지』를 거치며 이씨의 시는 변화를 모색중인 것 같다. 이런 점을 지적했더니 그는 “요즘 내 시가 좀 길어지고 있다”고 했다. 또 “왜 길어지나 스스로 생각해봤더니 하고 싶은 이야기에 대한 강렬함, 시 쓰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해지기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올해 이씨의 미당문학상 후보작은 자그마치 30편이다. 적지 않은 생산량이다. 미당문학상 본심에 오른 것도 올해가 처음이다. 많이 쓰기도 하지만 예전보다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는 시를 쓴다는 얘기다. 예심위원들은 이씨 시에 대해 “상투성에서 벗어나 세상을 낯설게 본다” “대상의 뒷면까지 시선을 밀고 가는 힘이 느껴진다”고 평했다.

 그런 특징 때문에 이씨의 시는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 오래 들여다 보게 만든다.

 후보작들 중 시의 제목에서 연상되는 이미지들이 시 전체를 관통하며 낯선 대상들을 한 줄로 꿰어내는 끈질김 같은 게 느껴지는 시가 눈길을 끈다. ‘바늘장수가 지나간다’가 그런 시다. 뭔가를 꿰매는 바늘의 이미지가 삐뚤삐뚤한 골목길의 달동네 정경과 잘 어울린다.

 이씨는 소개하고 싶은 시로 ‘사과 정물’을 골랐다. 시의 전체적인 의미는 불확실하다. 어렴풋하게나마 어떤 죄를 저질러 수감된 수인의 이미지에 캔버스에 그려진 사과 정물 그림을 빗대 표현한 작품으로 읽힌다. 사과는 과일 사과일 뿐 아니라 잘못한 일에 대한 사과(謝過)의 의미도 갖고 있는 것 같다.

 이씨는 ‘실수로 사과를 흙에 그렸을 때 사과에 흙이 묻었다’는 문장에 주목해 시를 읽어보라고 권했다. “가령 발끝으로 사과를 그리면 그 순간 사과에 흙이 묻지 않느냐”는 것이다. “실수로 어떤 대상을 사랑하게 됐을 때 진짜 사랑하게 되는 것 같다”는 말도 했다. 알쏭달쏭 사과 정물이다.

신준봉 기자

◆이기인=1967년 인천 출생. 2000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알쏭달쏭 소녀백과사전』 『어깨 위로 떨어지는 편지』.

사과 정물

참을성 있는 생명이 빨간색 모자를 썼다

사과는 캔버스에서 나오지 못한 독방의 주인이었다

수감된 방에서 사과의 불멸을 훼손하고 싶었다

정숙한 가운데 캔버스를 정면으로 걸어놓았다

잔인한 형벌을 겪었으므로 사과의 죄목을 떠올렸다

비공개적으로 사귄 칼날을 버리고 세밀한 붓을 만들었다

위협을 감춘 날에는 빨간색 수인번호를 붓끝에 올려놓았다

형벌의 틀을 갈아 끼우는 마당에서 혼자 사과를 그렸다

실수로 사과를 흙에 그렸을 때 사과에 흙이 묻었다

흙을 씨앗처럼 갖고 싶어 사과에 햇빛을 덧칠했다

환한 두 눈을 뜨고서 저지른 잘못을 후회하였다

캔버스에서 쾅 떨어진 사과의 운명을 믿었다

머리를 숙였을 때 비로소 코와 귀가 빨개졌다

충고의 방으로 굴러온 사과는 두 시선을 채웠다

광인의 눈으로 공포를 웃으며 공개처형을 기다렸다

붉은 붓칠로 완성한 사과는 불안을 한 입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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