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뿌리가 바뀐다] 4.연고주의 네트워크의 걸림돌인가-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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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사회의 도래와 함께 네트워크(아메바)형 기업조직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 조직은 규모가 작고 일과 여가를 구분하지 않으며, 인터넷과 같은 가상공간을 의사소통 방법으로 활용하기 때문에 의사결정이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아 외부환경의 변화에 신속히 대처할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다. 따라서 경쟁력있고 참신한 아이디어를 적극 개발할 수 있다.

이에 반해 거대 관료화된 기업조직은 위험부담이 큰 새로운 사업영역을 기피하고 시장지배력이 확보된 기존의 사업영역에 안주할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의사결정 단계가 복잡하고 형식적이기 때문이다.

관료화된 조직의 의견수렴이 민주적인 '하의상달(下意上達)' 을 따른다 해도 조직의 위계가 워낙 복잡해 아래로부터의 의견이 최종적인 의사결정으로 채택되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소요된다.따라서 거대한 기업조직은 시장환경의 변화에 기민하게 대처하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의 대표적인 기업조직인 재벌은 관료화된 거대기업의 병폐를 전형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지금까지 재벌조직은 의사결정과정이 '하의상달' 보다는 '상의하달' 이라고 비판받아 왔다. 최소한 이 지적은 올바른 지적이다.

그러나 재벌조직의 의사결정은 또 복잡한 위계를 따라 형식적인 방식으로 이뤄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총수의 기민한 판단이 절차를 무시한 채 조직의 말단까지 효과적으로 침투하면서 재벌은 사업의 기회를 포착해 왔다. 시장의 변화에 예민하고 창의력이 풍부한 총수의 존재가 바로 한국 재벌의 존립근거였다.

따라서 한국의 재벌조직은 오늘날 관심을 끌고 있는 네트워크형 기업조직과 일정한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고 봐야 한다.

비록 오늘날의 재벌이 공룡과 같은 거대한 조직으로 바뀌어 관료제의 병폐를 드러내는 경우가 없진 않지만 초창기 재벌은 모두 네트워크와 같은 기업조직으로부터 출발했다.

대우의 김우중(金宇中)회장이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뜻을 같이하는 소수의 몇사람이 모여 함께 먹고 자며 아이디어 하나로 사업을 구상하고 실행했다.

요즘말로 하면 벤처였다. 그러므로 재벌과 네트워크형 조직은 같은 뿌리를 가진 것이다.

또한 재벌조직은 흔히 족벌경영을 한다는 이유로 비난받는다. 그렇다면 벤처는 재벌과 얼마나 다른가. 벤처산업의 요람이라는 미국의 실리콘 밸리에서 이들 기업을 서로 연결해 주는 네트워크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인은 인종이다.

유대인 기업은 유대인 기업과, 중국인 기업은 중국인 기업과 협동하며 사업을 한다. 족벌과 과히 다르지 않은 특징이다. 실리콘 밸리에서 다음으로 중요한 네트워크의 기준은 또한 학연이다.

미국의 명문대학에서 공부하며 알게 된 젊은이들이 이곳에서 정보를 공유하며 사업을 하고 있다. 재벌의 문제인 혈연과 학연이 이곳에서는 오히려 장점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벤처의 조직과 연결방식은 한국적 인간관계와 사회적 신뢰의 기초가 되는 혈연.지연.학연을 그대로 활용하고 있는 셈이다. 서로 친밀한, 그래서 의사소통이 자유로운 소수의 집단이 학교와 지역, 그리고 가정에서 함께 일하고 생활하면서 벤처를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유석춘 교수 <연세대.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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