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광부 33인 ‘해피엔딩’ 아니었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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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 칠레 산호세 광산에서 매몰자를 구출한 뒤 환호하는 광부들. [산호세 AFP=연합뉴스]

지난해 8월 5일 칠레 북부 코피아포시 인근 산호세 구리 광산이 무너졌다. 당시 사고로 지하 700m 갱도에서 작업 중이던 33명의 광부가 매몰됐다. 매몰 광부들은 처음엔 모두 숨진 것으로 짐작됐으나 17일 만인 8월 22일 이들은 구조대가 뚫은 구멍으로 “33명 모두 갱도 내 피신처에 있다”는 쪽지를 매달아 보냈다. 그 뒤 구조작업은 숨가쁘게 진행돼 결국 모두 구출되는 인간 승리의 드라마로 막을 내렸다. 33명의 광부들은 똘똘 뭉쳐 갱도 생활을 버텨냈고 69일 만인 10월 13일 무사히 구조됐다. 이들의 생환 소식은 세계를 열광시켰다.

 하지만 사고 발생 1주년을 앞둔 현재 칠레 광부 33인이 마주한 현실은 ‘해피엔딩’과는 거리가 멀다. 영국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구출된 광부 33명이 생활고·후유증·법정소송이라는 3중고에 시달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33명 가운데 18명이 일자리를 찾지 못해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으며 광산 복귀를 희망하고 있다”고 전했다. 생환 직후 반짝 쏟아지던 관심은 사그라졌고 생활고가 찾아온 것이다.

 신문은 “국제적 유명세를 치른 탓에 씀씀이는 커졌지만 오랜 실업 상태가 지속되고 배상금을 제대로 받지 못해 생활고가 심각하다”며 “거액을 벌었을 것이란 주변의 그릇된 시선도 이들에겐 고통”이라고 전했다.

이들이 구출된 뒤 실제 손에 쥔 돈은 칠레 광산 재벌 레오나르도 파르카스가 건넨 1인당 500만 칠레페소(약 1200만원)의 위로금이 전부다. 이들을 고용했던 광산업체는 사고 뒤 배상금을 제대로 주지 못하고 파산했다. 사고 뒤 찾아온 후유증도 이들을 괴롭혔다. 3명은 실리콘 먼지로 생기는 폐질환인 ‘규폐증’ 진단을 받았다. 11명은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을 만큼 건강이 악화돼 퇴직했다. 악몽·환청·환각증에 시달려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이도 있다.

 지난달 이들은 정부를 상대로 “영세 광산에 대한 안전 규제를 소홀히 해 사고가 발생했다”며 1인당 5억7000만원을 배상하라는 소송을 냈다. 하지만 소송은 이들에 대한 여론을 악화시켰다. 해외로 호화 여행을 다녀오고 생환기를 담은 책을 출판하고 할리우드에 영화 판권을 판 광부들이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거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 나왔다. 구출 직후 광산주를 상대로 걸었던 배상금 소송도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하지만 지상 생활에 성공적으로 복귀한 이들도 있다. 매몰 기간 중 광부들의 우두머리 역할을 했던 루이스 우르수아(55)는 ‘동기부여 강사’로 변신했다. 그는 미국 전역을 돌며 희망을 전파하는 강연 여행을 하고 있다.

이에스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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