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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죽음의 그림자에 무릎 꿇지 마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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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김진국
김진국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김진국
논설실장

한국인이 죽음을 보는 눈은 엄숙하다 못해 경건하다. 죽음은 모든 시비를 끝내버리는 종결자다. 잘못한 일은 모두 묻어버린다. 잘한 일만 기억에 남는다. 오죽하면 죽음을 선택했겠느냐며 접어주기 때문이다. 잘못한 일을 기억하려 했다가는 죽음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되기 십상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수사했던 검찰은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책임을 떠안아야 했다. 남상국 전 대우건설 사장의 자살도 노무현 전 대통령을 궁지로 몰았다. 남 사장이 연임 로비를 벌인 사실은 묻히고, ‘억울하게’ 명예를 짓밟힌 사람이 됐다.

 권위주의 시절 반정부운동을 하다 스스로 목숨을 던진 사람들에게는 ‘열사(烈士)’란 이름을 붙여줬다. 일부 막장 드라마까지 마지막 장면을 자살로 미화해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그래선지 한국의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가장 높다. 자살률이 OECD 평균의 2.5배나 된다. 사망 원인 가운데서도 넷째다. 생산 가능 연령대에서는 1~2위로 올라간다. 죽음, 특히 자살에 대해서는 좀 더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 자살에 대한 감상적 태도는 무모한 죽음을 만들어낼 수 있다. 논리적 판단도 방해한다.

 죽음에 대한 엄숙주의 강박 탓에 목숨을 걸고 덤비는 사람에게 우리는 곧잘 주눅이 든다. 좌나 우나 벼랑 끝에 서서 목숨을 걸고 덤비는 것도 그 때문인지 모르겠다. 이렇게 달려들면 합리적 논의는 뒷전이 돼버린다. 러시안 룰렛처럼 누가 더 벼랑 끝까지 버티느냐로 겨루게 된다. 관용도 없고, 대화와 타협이 끼어들 여지도 없다.

 부산 영도에서 고공농성하는 김진숙씨도 마찬가지다. 1월 6일 칼바람 속에 35m 높이 크레인에 올라가 203일째 버티고 있다. 한 평 남짓한 쇳덩이 위 공간은 뙤약볕을 받으면 화상을 입을 정도로 달궈진다. 장마철 폭우를 피할 곳도 없다. 용변은 봉지에 싸 내려보내야 하는 처지다. 50대 여인이 일곱 달 가까이 머무른 것만으로도 죽음의 문턱을 넘나든 셈이다. 그 덕분에 한진중공업 사태는 전국적 이슈로 부각됐다. 이제 김씨를 내려오게 해야 한다. 그 정도면 충분한 효과를 거뒀다.

 김씨가 있는 85호 크레인은 2003년 김주익 한진중공업 노조지회장이 농성을 벌이다 목을 맨 곳이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곳이다. 트위터의 전파력, ‘희망버스’라는 동원력이 가세했다. 6월 11일 1차 ‘희망버스’에 700명이 몰렸고, 7월 9일 2차 ‘희망버스’엔 1만 명이 참가했다. 30일 다시 3차 ‘희망버스’가 계획돼 있다. 24일 오후엔 각계 인사 300여 명이 모여 ‘희망 시국회의 200’ 행사를 열었다. ‘희망버스’를 타느냐로 야당 대표의 정통성 시비를 벌일 정도가 됐다. 생명을 건 장엄함 앞에 시시비비는 무의미한 일이 돼버렸다. 이런 와중에 손학규 민주당 대표가 중립을 지켜야 한다며 ‘희망버스’를 타지 않기로 한 것은 대단한 결단이다.

 이번 사태의 경위는 이렇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로 조선업계에 불황이 닥쳤다. 선가(船價)가 30~40% 폭락하고, 한진중공업은 3년간 한 척도 수주하지 못했다. 2009년 관리직 356명을 희망퇴직으로 내보냈다. 지난해엔 생산직 400명에게 정리해고를 통보했다. 노조는 12월 20일 총파업에 들어갔다. 노사가 위로금 액수를 놓고 협상을 벌이던 1월 6일 김씨가 크레인에 올라갔다. 지난달 27일 노사가 위로금 액수를 조정해 극적으로 합의했다. 그러나 김씨는 이 합의를 거부하며 계속 농성 중이다.

 사실 이 사건은 한진중공업의 노사문제다. 김씨는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이다. 1981년 한진중공업 전신인 대한조선공사에 용접공으로 입사했으나 85년에 해고됐다. 사실상 외부인이다. 노사가 파업을 끝내기로 합의한 지 한 달이 지났다. 직장을 살리기 위해 다시 일을 해야겠다는 1400명의 요구를 묵살해선 안 된다. 희망버스의 목소리를 들으려면 이를 막으려는 부산 시민들의 불만도 같이 들어야 한다.

 정리해고를 하지 않고도 회사가 버틸 수 있는지는 냉정하게 따져봐야 할 문제다. 선심 쓰듯 내뱉을 문제가 아니다. 회사가 아예 문을 닫게 된다면 누가 책임질 것인가. 불법행위가 있다면 처벌하면 된다. 물론 온 나라가 시끄러운데도 해외로 피해 방관하는 조남호 회장의 태도도 무책임하다. 그렇다고 정치 권력을 이용해 법에도 없는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다. 희망버스는 이제 국회로 끌고 가라. 법으로 해결이 안 되면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제도를 바꾸는 게 정치권이 할 일이다.

김진국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