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사이에서 사라진 청춘 … 최인훈 ‘광장’ 속 명준 같은 삶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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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10월 9일 전두환 대통령의 아웅산 묘지 방문을 앞두고 북한 공작원이 설치한 폭발물이 터져 21명이 숨졌다. 사진은 폭발 직후 뼈대만 남긴 채 무너져 내린 건물. [중앙포토]


2008년 5월 동포 한 사람이 머나먼 미얀마의 감옥에서 혼자 외로운 죽음을 맞이했다. 온몸에 부상을 입은 불구의 몸으로 투옥돼 하루 두 끼 식사로 연명하며 25년간이나 이어왔던 감옥 생활을 이로써 마감한 것이다. 남북한을 통틀어 7000만 명의 한민족 중 어느 누구도 그의 죽음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심한 고통 속에서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그의 곁에는 기억조차 희미해진 모국의 언어로 마지막 말을 나눌 사람조차 없었다. 그의 몸은 화장돼 재는 이국의 대기 속으로 흩어졌고 그가 세상에 살았던 흔적도 모두 사라져 버렸다.

내가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바로 이 젊은이의 삶과 죽음에 관한 것이다. 이 글에 대해 부질없는 것이라고 외면하거나, 왜 상처를 다시 건드리냐고 화를 내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판단은 각자의 자유다. 하지만 한가지 부탁은 우선 이 이야기를 차분히 읽어봐 달라는 것이다.

나는 이 젊은이를 이상화하거나 낭만적으로 묘사할 생각은 전혀 없다. 두말할 나위 없이 이 젊은이는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 28년 전 당시 버마를 방문한 전두환 대통령을 암살하려고 폭탄을 터뜨려 수행 중이던 한국 정부 요인들을 무더기로 살상한 3인조 테러리스트 중 한 명이다. 엄중한 처벌을 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나는 조금만 차분한 마음으로 그의 일생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 본다면, 그가 어떻게 그런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는지 살펴본다면, 그만을 쉽게 단죄하기 어렵다는 걸 이해하리라 믿는다. 우리는 그를 그저 흉악한 죄인으로 단죄해 버리고, 모든 걸 그의 개인적인 책임으로 돌리고, 그가 겪은 일들, 그의 가슴에 맺힌 사연에 관해서는 귀를 막아버려도 되는 것인가? 아니다. 나는 이 젊은이의 비참한 운명에 관해 우리 모두가 책임의 일부를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정으로 통일을 바란다면, 그리고 통일이 그저 정치적인 사건이 아니고 우리 모두에게 사람으로서의 의미를 갖게 하는 일이라면, 우리가 한 일 혹은 하지 않은 일에 관해 심각한 반성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먼저 이 젊은이는 상부의 지시에 따라 테러를 자행했고, 그가 태어나고 자란 북한은 거의 모든 정보가 차단된 곳이며, 일반 사람의 생각과 정서도 일정한 방향으로 통제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외부의 정보를 접할 수 있어 스스로의 판단 능력이 있는 일반 테러범과는 다르다는 걸 고려해야 한다. 심지어는 성인이 된 이후에도 국가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만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돼 있어 그는 자신의 행동에 관한 옳고 그름을 분간하기 어려운 처지였던 것이다.

듀마의 소설 몬테크리스토 백작에 나오는 주인공은 자신을 비참한 처지에 빠뜨린 악인들에게 극적인 복수를 한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라면 이런 일은 좀처럼 이뤄질 수 없다. 죄 없는 사람을 지하 감옥에 처넣은 자들은 현실의 세상에선 온갖 명예를 누리고 후세에 그럴 듯한 이름까지 남겼을 것이다. 반면 에드몬드 단테스는 지하의 감옥에서 아무도 모르게 죽어 없어졌을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훨씬 더 많은 에드몬드 단테스를 우리 주변에서 찾을 수 있 을 것이다.

세상에는 ‘지워진 사람들(the Erased)’이 있다. 1991년 동구권의 유고슬라비아로부터 슬로베니아가 독립하는 과정에서 비(非)슬로베니아 민족 가운데 영주권을 박탈당한 1만8000명에 이르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한반도에서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지워져’ 온 것일까. 그들의 이야기를 썼던 작가는 “이 세상에서 ‘지워진 사람들’이 다시 존재하게 할 수 있게 하는 힘은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때 생겨난다”고 말했다. 2008년 이국의 감옥에서 숨져간 북한의 한 특수부대원은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지워졌다. 그러나 그가 겪은 고뇌와 외로움, 고통과 동경, 증오와 그리움은 이야기를 통해서라도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 남과 북의 이데올로기가 한 인간을 얼마나 철저히 지워버릴 수 있는지, 최인훈의 소설 광장에 나오는 주인공 ‘명준’은 결코 소설 속 인물이 아니고 수많은 ‘명준’이 현실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록돼야 한다. 그게 내가 이 증언을 하는 이유다.

강민철의 본명은 강영철이다. 강민철은 북한의 주요 인사가 흔히 쓰는 가명(nom de guerre)이었다. 미얀마인들은 그들이 부르기 쉬운 방식으로 그를 강민추라고 공식 기록에 표기했다. 공식 기록에는 1955년 4월 18일생으로 돼 있지만 그는 사실은 57년 7월 29일생이라고 말했다. 그는 강원도 북방의 통천 출신으로 거기서 태어나고 자랐다. 통천은 바닷가여서 교통 요지이면서 경치가 아름답다. 정주영 현대 회장 같은 유명 인사가 많이 배출된 곳이다. 해산물이 풍부해 살기가 넉넉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강민철은 83년 10월 당시 버마라고 불리던 나라에서 군경과 교전 끝에 중상을 입고 체포됐다. 대부분의 죄수가 20년 안에 사망한다는 ‘인세인’ 감옥에서 25년간 복역하다 2008년 5월 암으로 사망했다. 체포 당시 그는 온몸에 부상을 입어 왼쪽 팔은 절단되었고 얼굴, 오른쪽 어깨, 복부, 음랑, 양쪽 넓적다리 등 몸의 어느 한 군데 성한 곳이 없었다.

강민철은 고향에 3인의 가족이 있었다. 부친 강석준, 모친 김옥선 그리고 시집가지 않은 누이동생이 하나. 진지하게 결혼을 생각할 정도로 가까웠던 여자 친구도 있었다. 그러나 손 한번 제대로 잡아보지 못한 사이였고, 끝내 그는 숫총각으로 살고 죽은 셈이다. 북한의 다른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초등학교 4년과 중등학교 6년의 10년 과정을 졸업하고 군에 소집돼 군 생활을 시작했다. 학과나 운동 등 모든 면에서 뛰어났고 군 훈련 과정에서 우수한 성적을 올려 장교로 충원됐다. 특수 임무를 수행하는 특수 군사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이다.

이 학교 훈련생들은 전국에서 출신 성분이나 능력에 대한 엄격한 심사를 거쳐 선발된다. 전투나 무술·사격 등에서 뛰어난 능력의 소지자들이다. 이들은 모두 서로 실명을 알지 못하도록 돼 있었다. 교육 중에는 남한의 생활 방식에 익숙해지도록 하는 교과 과정도 있고 남한의 영화나 TV를 볼 수 있는 특권도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특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살인적인 훈련이 있었다. 기초훈련은 야외에서 생존 기술, 장거리 강행군 훈련, 산악에서의 야간 활동 등이다. 처음에 35㎏의 모래를 담은 배낭을 지고 10㎞의 속보 강행군을 하는데 차츰 거리를 늘려 20㎞, 40㎞ 그리고 50㎞까지 강행군을 한다. 육체적인 면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철인을 만든다. 남한에 침투한 요원 중에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자살을 하거나 지휘관에 의해 살해되는 경우도 있었다. 간혹 적지(한국)에서 수많은 군경으로 포위된 상황을 돌파하고 휴전선을 넘어 귀환하는 요원들도 있었다.

훈련병 중에는 한 달여에 걸친 기초 훈련 과정에서 탈락해 퇴교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고된 훈련을 끝내면 하늘·땅·바다를 가리지 않고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거의 만능의 전사가 된다. 혼자서 100t급 배를 운항할 수 있고, 전술 행동을 하면서 12마일을 수영할 수 있으며, 육지건 강이건 바다건 간에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고 이동할 수 있다. 강을 따라 수영을 하거나 특별히 설계된 잠수정에 타거나 혹은 매달려서 적지에 침투하는 것은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특히 일본에서는 한동안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자기 집처럼 특수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이들은 해외의 특수기관에 관한 강의도 받았는데 이스라엘의 모사드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강민철은 고된 훈련을 잘 이겨내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 바로 대위 계급장을 달았다. 군번은 9970이었다.

특수부대원으로 그는 많은 특권을 누렸다. 일반 군인이나 행정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감히 바라볼 수도 없는 수준의 보수 외에도 일반인이 구하기 어려운 물품들의 특별 공급도 있었다. 부대에는 매월 기차 한 차량분의 특별 보급품이 전달되었다. 외출 때에도 실제 계급보다 높은 위장 신분증을 갖고 나갔다. 엄격한 규율과 고된 훈련, 그리고 어려운 특수 임무는 20대의 젊은 청년에게 시련이라기보다 보람 있는 도전이었다. 20대 중반에 강은 이미 장래가 보장된 출세의 가도를 달리고 있었고 가족에게는 자랑과 희망, 그리고 동네의 친구 사이에서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운명은 이 젊은이를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길로 내몰았다. 83년 8월 그가 속한 ‘강창수 부대’의 지휘관인 강창수 중장은 3명의 장교를 불러들여 색다른 임무를 부여했다. 최고위층의 지시라고 했다. 선발된 그 3명의 장교 중 하나가 강민철 대위였다.

라종일 전 국정원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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