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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 소득보다 덜 올랐는데 사람들은 왜 폭등했다고 느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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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어라, 생각보다 적게 올랐네.”

 경기도 광명에 사는 보험설계사 장영자(55·여)씨는 19일 17년 전의 가계부를 들여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1994년의 물가와 이날 오전 동네에서 체감한 물가 사이의 괴리가 생각보다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씨가 이날 네 식구의 일주일치 먹을거리를 사는 데 쓴 돈은 모두 15만7190원이었다. 처음 들른 수퍼마켓의 가격이 조금씩 비싼 것 같아 조금 떨어진 대형마트로 발걸음을 옮겨 쇼핑한 결과다(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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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씨가 이날 수박 한 통, 참외와 사과 각 3개, 토마토와 포도 등 과일을 사는 데 쓴 돈은 3만8740원이었다. 돼지고기 두 근(3만4560원)과 멸치 한 봉지(200g·6400원), 오징어채 한 봉지(5090원) 등 반찬거리엔 6만원가량이 들었다. 여기에 야채(2만3900원)와 음료수·맥주·치즈 따위를 사는 데 3만5010원이 추가됐다.

 17년 전 이들 품목을 장씨가 구입하는 데 쓴 돈은 9만4370원이었다. 오징어채와 북어·유산균음료·계란 값은 지금의 절반이 훨씬 안 됐다. 돼지고기와 포도·딸기 등은 반값이었다. 하지만 외려 값이 내린 품목도 꽤 눈에 띄었다. 당근 3개 값은 900원에서 850원으로, 멸치 한 봉지는 8000원에서 6400원으로 싸졌다. 맥주와 파·참외 등은 94년 가격과 같았다.

장씨는 “그동안 남편 월급이 세 배가량으로 오른 걸 생각하면 17년 전보다 67% 올랐으니 크게 오르지는 않은 셈”이라며 “그런데도 살림 꾸리기가 옛날보다 힘드니 참 이상한 일”이라고 말했다.

 장바구니 물가의 역설이다. 통계청의 ‘가계동향조사’에 따르면 94년 1분기 161만원이던 도시가구 월평균 소득은 올 1분기 말 438만7000원으로 172% 늘어난 데 비해 식료품 구입 지출은 19만5000원에서 32만8000원으로 69% 증가하는 데 그쳤다. 전체 지출에서 식료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16%에서 9.4%로 줄었다. 가계를 힘들게 하는 고물가의 주범이 장기적으로 보면 ‘냉장고 물가’가 아니란 얘기다.

신창모 삼성경제연구소 수석경제연구원은 “소득이 어느 수준 이상으로 올라가면 식료품에 지불하는 비용이 낮아지게 된다”며 “한국의 가계지출에서도 엥겔계수가 꾸준히 떨어져 왔다”고 설명했다.

 그런데도 ‘옛날보다 물가가 폭등했다’고 느끼는 원인은 크게 세 가지다.

 먼저 가계흑자 비율의 축소다. 가계 소득은 커졌지만 쓰고 남는 돈의 비율이 크게 줄어 “살기가 힘들어졌다”는 압박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1994년 소득에서 총 지출을 뺀 가계 흑자액은 38만원으로 소득의 24%가량이었다. 2011년엔 흑자액이 90만8000원으로 늘어나긴 했지만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로 떨어졌다.

문승태 통계청 복지통계과 주무관은 “생활물가는 상대적으로 덜 올랐지만 집값 상승에 따른 전세금이나 대출금 부담이 커지면서 총 소득에서 가계가 실제로 쓸 수 있는 돈이 상대적으로 줄어든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민은행 부동산연구소에 따르면 서울·경기 등 수도권의 아파트값 상승률은 2000년 이후에만 106.9%를 기록했다. 국민은행 관계자는 “통계가 없는 94~99년 상승률을 합하면 부동산 값이 장바구니 물가보다 적어도 서너 배는 더 뛰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동통신비와 사교육비 등 과거에는 없었거나 적었던 지출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도 이유다. 94년 2만원이던 가계의 평균 통신비는 1분기 말 14만5000원으로 6배 넘게 늘었다. 교육비도 마찬가지다. ‘사교육 열풍’이 급격히 퍼지면서 예체능 과목이 주였던 학원비 지출이 거의 모든 학과 과목으로 확대됐다. 가계의 교육비 지출은 17년 새 10만3000원에서 40만8000원으로 3배가량 증가했다. 서울 대치동에 사는 주부 서명원(53·여)씨는 “식구 4명의 한 달 통신비가 30만원을 넘을 때도 있다”며 “음식값보다 통신비가 가계에 훨씬 위협적”이라고 푸념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풍경기억상실’ 효과도 한몫을 한다. 빙하 옆에 사는 사람들은 빙하의 규모를 지난해와 비교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빙하가 녹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다. 임기영(국제통상학부) 외국어대 교수는 “장바구니 물가를 구성하는 식료품값은 날씨와 수요·공급에 따라 연도별 등락이 심한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를 때의 인상을 오래 기억한다”며 “물가 상승기에 실제보다 더 많이 오른다고 사람들이 느끼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오정근(경제학) 고려대 교수는 “특히 전세나 월세는 조금만 올라도 서민들이 느끼는 물가 상승의 압박은 장바구니 물가의 영향보다 절대적”이라며 “장바구니 물가를 잡기 위한 노력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정부가 부동산 값이나 통신비 등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는 데 보다 집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나현철·김혜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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