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박도 싫다” 정기적금의 부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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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분당에 사는 가정주부 강모(34·여)씨는 최근 카드 사용 실적에 따라 최고 연 7%의 금리를 주는 은행 정기적금에 가입했다. 2007년에 가입한 해외주식형 적립식 펀드가 원금을 회복하자 그는 펀드를 해지하고, 여기에 넣던 돈을 적금에 붓기로 한 것이다. 강씨는 “금리가 높은 데다 펀드처럼 원금을 떼일 염려가 없어 선택했다”며 “한번 원금 손실을 경험해 보니 종잣돈을 모아 목돈을 만들던 적금의 추억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깨달았다”고 말했다.

 서민들의 대표적인 투자상품인 은행권 정기적금이 화려하게 귀환했다. 17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해 5월 말 기준 은행권의 정기적금 잔액(말잔 기준)은 총 22조2088억원을 기록했다. 사상 최대다. 공격적인 주식형 상품에 관심이 높던 개인들의 재테크 패턴이 달라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정기적금은 목돈을 만들려는 서민들에게 가장 사랑을 받던 상품이었다. 각종 세금 혜택에 금리도 높았다. 덕분에 정기적금 잔액은 2003년 9월 20조4241억원까지 계속 불어났다. 하지만 국내 증시 호황과 적립식 펀드 열풍이 불면서 개인들의 자금이 은행을 떠나 증시로 몰리기 시작했다. 적금액은 2004년 11월에 20조원이 깨지더니 2008년 1월엔 12조원대까지 쪼그라들었다.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반 토막’ 펀드들이 속출하자 정기적금은 다시 부활의 날개를 폈다. 2009년 20조원을 다시 돌파했고, 2010년 6월엔 2003년의 최고치를 다시 갈아치우면서 꾸준히 잔액을 불려가고 있다.

 법인의 가입 비중이 더 많은 정기예금과 달리 정기적금은 개인의 가입 비중이 압도적이다. 정기적금이 늘어났다는 건 개인들의 투자 패턴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국민은행 수신부 유기열 팀장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인기 펀드들이 마이너스 수익을 내면서 안전자산 선호현상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며 “대박을 노리는 대신, 적금으로 한 푼 두 푼 열심히 모아 목돈을 마련하는 알뜰 투자자들이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은행들이 각종 부가기능을 추가한 ‘고(高)금리’ 신상품을 내놓은 점도 인기 회복을 이끌고 있다. 또 부동산 시장의 침체는 장기화되고 증시가 불안한 모습을 보인 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하나은행 백미경 정자중앙지점장은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한 개인 자금이 정기적금으로 몰린 것”이라며 “경기가 안 좋을 때 정기적금 가입자가 늘어나는 점을 감안하면 인기가 한동안 이어질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런 투자자들의 요구에 맞춰 은행들은 고금리 정기적금을 앞다퉈 내놓고 있다. 정부가 최근 은행권의 예대율(예금 잔액에 대한 대출금 잔액의 비율)을 100% 이하로 낮추는 기한을 2012년 6월 말로 1년6개월 앞당겼기 때문에 고금리 적금의 출시는 이어질 전망이다. 한 은행 관계자는 “은행으로서는 대출을 줄이거나 예금을 늘려야 하는 압박을 받기 때문에 예·적금 금리를 높여서라도 고객을 유치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손해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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