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 대신 협동, 승부 대신 재미모두 즐거운 ‘윈윈 스포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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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오현초등학교 학생들이 학교 운동장에서 티볼 경기를 하고 있다. 티볼은 말랑말랑한 공을 정지된 상태에서 치는 게임이라 남학생과 여학생이 함께 어울릴 수 있다. 조용철 기자

남성중심 사회에서 양성평등 사회로 바뀌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스포츠도 변화하고 있다. 과격하고 남성중심적인 근대 스포츠를 변형한 소프트 스포츠(Soft sports)가 각광받고 있다. 기존 스포츠가 경쟁과 승리에 초점이 맞춰졌다면 소프트 스포츠는 협동과 재미를 추구한다. 남성중심 스포츠의 구경꾼과 들러리 역할에 그쳤던 여성, 스포츠를 즐기고 싶어도 부상 위험 때문에 망설였던 노년·유소년이 소프트 스포츠의 주인이 됐다. 복잡한 룰을 단순하게 고치고, 손쉽게 스포츠를 즐길 수 있도록 장비도 개량했다. 선진국에서 이미 자리를 잡은 소프트 스포츠는 국내에서도 서서히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소프트 스포츠는 근대 스포츠의 대안으로 등장한 뉴 스포츠의 한 갈래로 볼 수 있다. 뉴 스포츠는 근대 스포츠 경기 규칙을 쉽고 안전하게 바꾼 것이다. 학계에서는 변형 스포츠(Modified sports) 또는 대안 스포츠(Alternative sports)라고 부른다.소프트 스포츠의 이념적 배경은 1970년대 초 핸드볼에서 나온 추크볼(Tchoukball)의 탄생에서 찾을 수 있다. 스위스의 생물학자 H 브랜드 박사는 70년 발표한 ‘단체 스포츠의 과학적 비판’이란 논문에서 근대 스포츠를 ‘침략적’이라고 규정했다. 브랜드 박사는 ‘신체활동의 목적은 경쟁을 통해 승자와 패자를 나누는 게 아니라 조화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는 것’이라는 신념으로 몸싸움이 없는 추크볼을 창안했다.

이후 야구의 규칙을 바꾼 티볼(T-ball)이 80년대 초 만들어졌고, 미식축구에서 나온 플래그 풋볼(Flag football), 필드하키를 변형한 플로어 하키(Floor hockey) 등이 대표적인 소프트 스포츠로 자리매김했다.미국에서 플래그 풋볼은 이미 정규 교과과정에도 들어 있을 만큼 대중화됐다. 이뿐만 아니라 패들볼·플로어볼·라크로스·산악자전거 등 뉴 스포츠와 익스트림 스포츠가 9~12학년 체육 프로그램 49개 종목 중 15개를 차지한다. 일본도 소학교 3~4학년의 게임 영역에 뉴 스포츠가 야구형, 축구형, 농구형 게임으로 나뉘어 반영돼 있다. 5~6학년은 소프트볼과 소프트 발리볼을 배운다.

국내에서도 체육교사를 대상으로 한 자격연수와 특수분야 연구에서 뉴 스포츠의 비중이 해마다 늘고 있다. 인하대와 고려대 등에서는 ‘뉴 스포츠’라는 강좌를 개설해 학생들이 직접 체험할 수 있게 했다. 또 2007년 개정 교육과정에는 이미 다양한 뉴 스포츠가 포함돼 있다.

“근대 스포츠의 배경은 제국주의”
류태호 고려대 체육교육학과 교수는 “6차 교육과정에는 소프트 스포츠를 포함한 뉴 스포츠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일선 교사들의 요구로 7차 개정안에는 뉴 스포츠를 즐길 수 있게 문을 열어 놨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중심으로 소프트 스포츠에 대한 교육이 이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소프트 스포츠가 각광받는 이유는 근대 스포츠의 태생적 한계가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 스포츠는 1800년대 중반∼1900년대 초에 규칙이 만들어졌다. 당시는 서구 제국주의가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침략하던 시기다. 또 여성에게 투표권이 있는 나라가 거의 없어 철저히 남성 중심적인 시대였다. 이런 사회적 토양은 산업혁명 이후 태동하고 급속도로 발전한 근대 스포츠에도 영향을 미쳤다.

영국축구협회가 처음으로 근대식 축구 규칙을 만든 것도 1863년이고, 미식축구 공식경기가 처음 열린 것도 1869년으로 알려져 있다. 야구 역시 1845년 니커보커 야구협회가 근대 규칙을 공식화했다. 이들 종목은 하나같이 건장한 남성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그 외 사람은 관중으로 구분돼 간접적인 참여만 가능하다. 또 근대 스포츠에 참가하는 이들의 목적은 ‘경쟁’과 ‘승리’다. 경기는 폭력적이고 침략적인 이념 아래 만들어졌다.하지만 자유가 확대되고, 여성의 사화참여가 늘면서 한계가 명확해졌다. 근대 스포츠는 폭력적 기반에서 나와 위험하고 거칠다. 최근 국내 프로야구에서 기아의 김선빈이 타구에 얼굴을 맞아 골절상을 당했다. 미식축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태클과 몸싸움은 치명적인 부상을 유발함은 물론이고 자칫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2007년에는 케비언이란 미식축구 선수가 상대의 태클에 목이 부러져 사망한 사고도 있었다.

플래그 풋볼은 미식축구에서 거친 태클과 몸싸움을 뺐다. 전체적인 규칙은 미식축구와 비슷하다. 다만 경기를 관전하는 사람들에게 자극적인 장면을 보여주기보다, 참여자의 안전과 즐거움에 초점을 맞췄다. 각 선수의 허리에 매달려 있는 가늘고 긴 깃발(플래그)을 뺏는 것으로 수비를 대신했다. 거친 태클이 없어 무거운 보호 장비도 필요 없다. 한 팀의 인원도 5명으로 11명이 뛰는 미식축구에 비해 적다. 경기장 크기도 작아 공원에서도 쉽게 즐길 수 있다.

“스포츠 참여자 진입장벽 낮춰 줘”
추크볼은 상대방이 소유하고 있는 공을 가로채지 못한다. 그러니 몸싸움도 없다. 손으로 공을 패스하고 슈팅하는 것은 핸드볼과 비슷하지만, 상대 팀과 경쟁보다는 팀원끼리 조화가 중요하다.
티볼과 플로어 하키는 위험한 도구를 안전하게 바꾼 경우다. 야구공은 무겁고 딱딱하다. 이런 공을 프로야구에서는 시속 150㎞가 넘는 속도로 타자를 향해 뿌린다. 심지어 타자의 머리를 향해 위협구를 던지기도 한다. 글러브라는 도구가 없으면 공을 잡을 수 없다. 타자도 팔꿈치와 발목에 보호대를 착용하고 타석에 선다. 그러나 티볼은 이런 딱딱한 공 대신 부드러운 폴리우레탄 재질로 돼 있다. 국내에서는 야구공과 모양이 똑같지만 딱딱하지 않은 연식공을 쓰는 ‘연식야구’도 성행하고 있다.
필드하키와 규칙이 똑같은 플로어 하키도 딱딱한 나무 스틱 대신 플라스틱 스틱을 쓰고, 공도 연성 플라스틱으로 만들어 부상의 위험을 줄였다.

류태호 교수는 “소프트 스포츠는 근대 스포츠와 비교해 규칙이 부드럽고 사용하는 도구도 유연하다. 스포츠의 이념을 더욱 보편화한 게 특징이다. 근대 스포츠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소프트’는 이념과 규칙, 도구에서 근대 스포츠보다 부드럽다는 뜻이다. 류 교수는 또 “소프트 스포츠는 운동에 참여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진입장벽을 낮춰 줘 결국 스포츠 시장의 저변확대로 연결될 수 있다. 또 이념적으로도 현대사회가 추구하는 협동과 상생에 부합하기 때문에 교육적 차원에서도 도움이 된다”고 부연했다.

김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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