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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편지 〈비지스의 '홀리데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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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시인이 되고 싶어 했고 국어교사 출신이었다는 말도 있다. 마지막에 자살 기도를 하며 그는 경찰에게 비지스의 〈홀리데이〉가 든 테잎을 건네달라고 했다.

꿈꾸듯 감미로운 선율로 〈홀리데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창문 턱에 걸터앉은 그의 얼굴에 야릇한 미소가 번졌다. 노래가 끝나갈 무렵 그는 깨진 유리 조각으로 서서히 제 목을 긋기 시작했다.

이때 경찰에 들이닥쳤고 한낮의 정적을 깨뜨리는 네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마치 부풀어오를 대로 부푼 비눗 방울이 한 순간에 터지듯 그는 자신이 그렇게 좋아하던 노래 한 자락에 짧은 생을 묻었다.

지금부터 약 12년 전인 88년 10월의 일이다. 서울 은평구 북가좌동 인질극 현장에서 생생히 지켜본 미결수 지강헌의 탈주극 사건의 비극적 피날레였다."

오늘은 시내에 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장미를 몇 송이 사와 화병에 꽂았습니다. 대궁 끝을 일일이 연필 끝처럼 깎아서 말이죠. 이렇게 하면 꽃이 오래 간다고 합니다.

꽃을 오래 보기 위한 또 한가지 방법: 물을 갈아줄 때마다 화병에 아스피린을 한 알씩 넣어준다. 하지만 이는 왠지 마취나 방부 처리를 하는 기분이 들어 썩 내키지가 않습니다. 안 그래도 아랫도리가 잘려 팔려온 장미에게 한번 더 몹쓸 짓을 하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이제 얼굴의 화상은 좀 가라앉았습니다. 감자를 갈아붙이고 영양 크림을 발라 문질러대는 소란을 저녁마다 되풀이한 덕분에 그나마 원숭이 꼴을 모면한 것입니다.

찬바람을 쏘이면 피부가 견딜 수 없이 조여들고 아파 그동안 외출을 안 하고 지내다 오늘 낮에서야 서울에 나가 일본 영화 〈러브 레터〉를 봤습니다. 얼음 속에 죽어 있는 빨간 고추 잠자리가 인상적이더군요.

화병을 티테이블에 올려놓고 〈비지스〉를 듣습니다. 비지스의 노래 중에서 저는 특히 〈First of May〉와 〈Holiday〉를 좋아합니다. 앞의 것은 제 생일이 5일 1일인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저는 조용히 생일을 숨기고 삽니다. 그러다 매년 생일이 되면 혼자 양복을 입고 나가 서울의 야경이 내려다보니는 하얏트 호텔 바에서 와일드 터키를 스트레이트로 두 잔 마신 다음 꽃집에 들러 배꽃을 사고 일 년 내 묵혀 두었던 질항아리를 닦아 거기에 꽃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맥주를 마시며 〈First of May〉를 되풀이해서 듣곤 합니다. 매화(2월), 벚꽃(3월), 배꽃(4월), 저는 이런 꽃들을 좋아합니다. 다른 것은 모란(5월) 정도입니다.

〈Holiday〉는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중학교 땐가 처음 들었을 겁니다. 그로부터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항상 이 노래를 들곤 합니다. 긴 여행길에는 아예 CD를 가지고 다닙니다.

그러기에 이제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내가 다닌 세상의 많은 풍경들이 떠오릅니다. 봄마다 완행버스를 타고 오르락내리락 하는 속초-포항-경주 간 7번 국도. 이 길은 여전히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저물녘의 서해 바다. 실크로드. 사막에 하염없이 내리던 눈. 이국의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을 때 검은 개를 끌고 가던 초로의 눈 먼 신사. 서글픔뿐이었던 밤의 정적. 그 밤이 지나고 아침녘 처마 밑으로 쏟아져 들어오던 한가마의 눈부신 햇빛.

〈Holiday〉를 듣고 있으면 마음은 문득 홀연해지고 날개가 달린 고기(날치)처럼 물에서 가볍게 푸른 하늘로 날아오르는 기분에 사로잡힙니다. 그때 세상 모든 풍경은 더없이 투명하고 아름답게 눈알에 와 박히고 귀에선 온갖 잡다한 소요가 사라지고 사랑하는 사람마저 쉽게 풀어주고 싶은 마음이 됩니다.

유람선을 타고 혼자 긴 운하를 따라 바다로 떠내려가는 환상에 빠집니다. 곧 떠나지 않으면 영영 떠나지 못할 것처럼 마음이 밀가루 반죽처럼 부풀어오릅니다. 아스피린을 먹은 대낮처럼 혈관이 이완되며 온몸이 나른해집니다. 또 조금은 서글프고 또 어쩐지 조금은 망각처럼 달콤한 느낌.

베란다에 있는 하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하오의 햇빛을 바라보며 하이네캔을 마십니다. 뒷전의 장미를 이따끔씩 헤어진 연인처럼 돌아보며. 생의 어느 하오. 두고 온 열대를 다시 떠올립니다. 슬픔의 옷자락 같은 그림자가 언뜻 하늘에 나타났다 사라집니다.

곧 봄입니다. 먼 데서 투명한 화적떼를 끌고 기어이 봄은 오고 있습니다. 일전 순천이 고향인 친구의 아버님과 통화하다 들은 얘기......그 해 장마철에 제가 묵었던 산막 주변에 매화가 피어 코가 매웁다고 합니다.

매화가 폈으니 벚꽃도 곧 피겠지요. 그것들 서둘러 피어 밤 평상에 앉아 머리에 흰 꽃잎을 맞으며 오래 된 우리 술을 마시고 싶습니다. 곧 간첩처럼 내려가 그러할 것입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한 줄의 이런 엽서를 쓰고 후년을 기약하며 다시 그곳을 떠나 오겠지요. 혹은 비지스의 〈홀리데이〉를 들으며.

"나그네는 꽃 지는 밤에 다니는 법입니다."

언제 꿈꾸는 그리운 날이 오면 사방으로 햇빛을 볼 수 있는 흰 안락의자에 앉아 당신과 목이 쉬도록 오래, 그러나 조용히, 그때 되살아나는 생의 풍경들을 즉흥적으로 얘기하고 싶습니다. 하물며 밤이 늦도록. 오늘 밤엔 비지스의 〈홀리데이〉를 한번쯤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이만 접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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