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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미국이 보이지 않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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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문정인
연세대 교수·정치외교학과

2008년 미국 대선 중 오바마 후보의 행보는 파격적이었다. “북한의 지도자와 장소나 시간에 구애 받지 않고 만날 용의가 있다”고 공언한 그는 ‘지속적이고 직접적인 공격 외교’로 북핵(北核)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오바마 행정부 초기 북한과의 대타협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관측이 쏟아져 나온 이유였다. 하지만 예상은 이내 어긋났다. 3년이 지난 지금도 북핵 문제는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고, 오바마 행정부는 줄곧 회피와 제재로 일관해 왔다. 한마디로 북핵 문제 해결에 미국의 주도적 역할이 보이지 않는다.

 이는 그간 미국이 견지해 온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 정책의 산물이라 하겠다. 오바마 대통령은 2009년 4월 5일 북한의 미사일 시험 발사에 대해 “규칙은 지켜져야 하고 위반하는 국가들에는 처벌이 가해져야 한다. 이는 빈말이 아니다”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 발언 이후 미국은 북한이 적대적 태도를 버리고 개과천선(改過遷善)한 모습을 보일 때까지 대화에 나서지 않겠다는 입장을 취해 왔다.

 기다린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북한의 ‘나쁜 행동’에 대한 강력한 응징도 이어졌다. 유엔 안보리 결의안과 독자행동을 통해 강도 높은 경제·금융제재를 가하는 한편,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에 의거해 의심 가는 북한 선박에 대한 광범위한 검색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도 중단했다. 모두 ‘고통을 가한 만큼 얻을 것도 많다(More pain, more gain)’는 발상에서 나온 행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제재의 약발은 그다지 신통치 않은 듯하다. 북한 경제는 중국 덕분인지 여전히 굴러가고 있고, 가해지는 고통의 강도에 비례해 평양의 도발적 행태는 더욱 거세졌다. 2차 핵실험과 농축우라늄 시설 가동으로 핵 무장력을 강화해 나가면서 북한이 5년 이내에 핵탄두 장착이 가능한 대륙간탄도미사일 개발에 성공할 것이라는 전망마저 나온다.

 “북한이 미국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고 있다”는 로버트 게이츠 미 국방장관의 올해 초 발언은 이런 상황의 심각성을 방증한다. 얼마 전 올리 하이노넨 전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차장은 북한이 앞으로 3년 내에 현재 확보하고 있는 플루토늄보다 더 많은 고농축 우라늄을 보유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크게 우려되는 대목이다.

 ‘전략적 인내’의 또 다른 축은 남북관계 문제였다. ‘평양이 워싱턴과 대화하고 싶으면 서울을 거쳐서 오라. 미국은 그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메시지가 그 핵심이다. 이는 북한의 ‘통미봉남(通美封南)’ 술책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였지만 역시 별다른 효력을 내지 못하고 있다. 남북관계는 대청해전, 천안함 피폭, 연평도 포격을 거치며 계속 악화돼 왔다. 이제는 더 큰 군사적 충돌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고야 말았다.

 이렇게 놓고 보면 ‘전략적 인내’는 결과적으로 실패한 정책 아닌가. 북핵 문제를 주도적으로 풀어나가야 할 미국이 어떠한 비전도, 대책도 제시하지 못한 채 방관자적 외교에 안주하는 모습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동맹결속 강화’를 명분으로 한국 정부의 의견을 전적으로 수용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한국에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인상마저 준다. 이런 모습을, 과연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 전체의 평화와 안정을 도모해야 하는 패권적 지도국으로서 책임 있는 태도라고 할 수 있을까.

 오바마 행정부의 대외정책 모토는 ‘스마트 파워(Smart Power)’ 외교이고, 그 핵심 취지는 유연성에 있다. 안보환경 변화의 맥락과 흐름에 관한 정보(Contextual Intelligence)를 명확히 읽어내 탄력성 있게 정책에 반영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략적 인내’ 정책에는 불행히도 이러한 유연성이 결여되어 있다. 이제라도 현 국면을 세심히 재평가하고 남북-북미-6자 재개라는 도식적 순차론에서 벗어나 미국 주도하에 보다 신축성 있는 동시다발적 대화와 관여의 정책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소식은, 클린턴 2기 행정부에서 ‘페리 프로세스(Perry Process·페리 전 국방장관이 만든 북핵 해법)’를 주도적으로 추진하며 대북 관여정책의 핵심역할을 맡았던 웬디 셔먼이 최근 국무부 정무담당 차관으로 지명됐다는 것이다. 2003년 초 2차 핵 위기가 고조될 무렵 한창 경직돼 있던 부시 행정부에 “한국에 귀 기울이고 북한과 대화하라(Listen to the South, Talk to the North)”라는 과감한 충고를 던진 인물이다. 그를 통해 미국의 대북정책이 유연한 반전의 계기를 얻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문정인 연세대 교수·정치외교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