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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장이 아름다운 정치인을 보고 싶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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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호 34면

들어가기보다 나가기가 어려운 곳이 있다. 여의도 정치판이다.
미국과 비교하면 한국은 정치권 진입 장벽이 높지 않다. 적당한 경력으로 당 지도부와 관계만 생기면 공천을 받고, 많은 지역에서 공천장은 당선증으로 통한다. 줄을 잘 서면 선수(選數)를 늘리는 데 어려움이 적다. 한마디로 쉽게 간다. 미국선 현역 의원이 재선되는 비율이 90%다. 현역 의원이 아니면 의원 될 확률은 10% 미만이라는 얘기다.

최상연 칼럼

퇴장은 다르다. 미국에서 정계를 떠나는 사람은 대체로 자기 발로 걸어 나간다. 그것도 선거를 1~2년 남겨 놓고 차기 선거 불출마를 선언한다. 누구든지 다음 선거를 준비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 하지만 한국에선 들것에 실려 나가기 전엔 좀처럼 링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 최소한 공천이 확정될 때까진 버틴다. 대통령이 돼야 정계를 떠나는 것으로 안다. 그렇다고 역대 대통령의 그림자가 아름다운 것만도 아니었다.

내년 선거 때도 그럴 모양이다. 18대 전반기 국회의장을 지낸 김형오 의원이 엊그제 내년 총선 출마 의사를 기자들에게 내비쳤다. 국회의장을 마치면 정치를 접는 추세였다. 김 의원은 1960년대 6~7대 국회의장이었던 이효상 케이스를 염두에 뒀는지 모르겠다. 이 전 의장은 9~10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한나라당 내 젊은 의원들로부터 불출마 압력을 받는 이상득 의원이 들으면 반길 얘기다. 국회 부의장을 지냈을 뿐인 이 의원에겐 할 말이 추가됐다.

문제는 유권자의 생각이다. 표심은 물갈이에 관심이 많다. 영남 지역에선 현역 의원을 다시 찍겠다는 유권자가 20%에 불과하다는 조사까지 나왔다. 의원들 자신이 이런 사실을 잘 안다. 거리 의정보고회를 다녀온 의원들은 “민심이 흉흉하다. 확 바꾸라는 게 길거리 민심”이라고 전한다.

물갈이가 능사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다선 중진 의원의 의정 경험은 국민 모두의 소중한 자산이다. 행정부 견제를 주도하는 보석 같은 힘이다. 실제로 초선 의원 중심의 국회가 방향을 잃고 우왕좌왕 속에 빠져든 혼란의 경험을 우린 갖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한나라당엔 초선 의원이 94명이다. 전체 의원 169명의 56%에 달한다. 지금은 물갈이 대상이 됐지만 한때 이들은 모두 자랑스러운 영입 대상이었다. 도덕성과 개혁의 상징이었다. 노무현 정부에선 폭이 더 컸다. 당시 집권당이던 열린우리당은 국회의원 152명 중 초선의원이 108명으로 71%였다. 하지만 새 정치의 동력이라던 이들은 혼란과 갈등을 거듭하다 ‘탄돌이’로 몰려 퇴진했다. 당은 4년 만에 아예 간판을 내렸다.

민심은 천심이다. 바꾸라는 게 민심이라면 바꿔야 한다. 그러나 잘 바꿔야 한다. 그런 점에서 한나라당은 15대 신한국당 공천을 연구할 필요가 있겠다. 95년 지방선거서 패배한 김영삼 정부는 96년 총선을 앞두고 절치부심(切齒腐心)했다. 사람을 찾는 데 혈안이었다. 이명박·이재오·김문수·안상수·홍준표·이우재 등이 모두 당시 입장했다. 손학규도 비슷한 시기 재·보선을 통해 입문했다. 이회창·이홍구·황우여는 전국구였다. 비슷비슷한 인물의 물갈이가 아니다. 외연을 넓힌 ‘새 피 수혈’이었다. 기억하고 되새길 중요한 대목은 이들이 하나 같이 신한국당 텃밭이 아닌 서울 강북이나 수도권 험지에서 싸웠다는 사실이다.

한나라당은 위기다. 정치 인재를 더 신중하고 까다롭게 찾는 작업이 당연히 필요하다. 비슷한 경력을 가진 그렇고 그런 사람이 연줄로 대충 입장하는 구조를 바꿔야 한다. 이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96년엔 당 총재를 겸한 대통령의 큰 칼이 있었다. 지금은 아니다. 이젠 리더십이다. 말발이 먹히려면 깨끗한 손이 있어야 한다. 힘은 지도급 인사들의 솔선 수범에서 나온다.

김형오·박희태 전·현 의장, 이상득·홍사덕 전 부의장은 당의 자산이자 살아 있는 권위다. 당 위기를 맞아 외풍을 막아줄 정치 거물이다. 모두 영남권 중진이지만 전국적으로 검증된 원로 정치인이다. 그래서 생각해 본다. 원로들이 김 전 의장처럼 출마 결심을 굳혀가는 과정이라면 서울 강북이나 수도권 험지와 같은 한나라당으로선 상징성이 큰 지역에 나서는 게 어떨까. 96년 총선처럼 말이다.

아름다운 입장과 아름다운 퇴장이 많은 정치가 아름답다. 아름다운 정치를 만드는 정치인이 영웅이다. 정치 영웅이 정치의 품격을 높인다. 총선이 9개월 앞이다. 아름다운 입장과 퇴장을 준비하기엔 빠듯한 시간이다. 한나라당도 우리도 정치 영웅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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