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 창업을 격려 못하는 사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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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호 35면

지난 7일 오후 7시30분 서울 동빙고동 캐피탈호텔 3층. 80평이 좀 못 되는 연회장엔 20대 초·중반의 청년 100여 명이 눈을 반짝이며 앉아 있었다. 저녁 식사 시간을 훌쩍 넘긴 시각이지만, 연회장 한쪽 끝에 차려진 음식엔 손도 대지 않았다. 객석에도 빈자리는 찾아볼 수 없었다. 연회장 안쪽 무대엔 대학생 7, 8명이 나와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 쓰며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했다. 무대 바로 아래 놓인 길쭉한 테이블엔 심사위원으로 보이는 사람 5명이 앉아 질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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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행사는 2008년 이소연씨에게 한국 첫 우주인 자리를 내줬던 ‘예비 우주인’ 고산(35)씨가 기획한 ‘스타트업 스프링보드 48(Startup Springboard 48)’이다. 행사 이름을 굳이 풀자면 ‘이틀(48시간) 동안 진행되는 벤처기업 창업을 지원하기 위한 도약대’쯤 되겠다. 미국ㆍ독일ㆍ영국 등 12개국 교포 대학생 74명과 국내 대학생 39명이 참여해 창업 아이디어를 겨루는 자리였다. 심사위원엔 고산씨 외에 이상목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사무총장, 유승식 하버드대 의대 교수, 벤처기업 대표 2명 등이 참여했다. 1등은 산과 들에서 편리하게 식물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는 스마트폰용 애플리케이션 아이디어를 만든 팀이 차지했다. 캘리포니아주립대 데이비스에서 온 박사 과정 학생이 이끄는 팀이다.

고산씨는 미국 등 서구 젊은이들의 창업ㆍ도전 정신을 한국 대학생들에게 심어주고 싶다고 했다. 그 자신이 ‘끝없는 도전’을 펼치는 청년이기도 하다. 러시아를 다녀온 후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을 거쳐 미국 캘리포니아 싱귤래러티대학을 마쳤다. 지난 2월엔 사단법인 ‘타이드(TIDE)’를 설립했다. 싱귤래러티대학을 모델로 한 한국형 창업 지원 단체다. 그는 지금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에서 석사과정(공공정책)을 밟고 있다.

기자는 연회장 구석에 서서 행사를 지켜봤다. 영어와 한국어를 왔다 갔다 하는 희한한 발표 속에 세계 속 한인 청년들의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이날 행사는 예정시간을 한 시간 넘긴 8시30분에야 마쳤다. 전날도 학생들은 자정을 훌쩍 넘긴 오전 1시30분까지 팀별 토론을 벌였다고 한다.

기자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경남의 한 사립대를 졸업하고 아직 정규직을 잡지 못하고 있는 조카, 이번 주 내내 취재하고 기사를 준비해온 생계형 아르바이트에 내몰린 국내 대학생들의 모습이 캐피탈호텔 3층 행사장의 학생들과 오버랩됐다. 지하철 2호선 봉천역 부근 일본식 덮밥집에서 일한다는 대학생은 졸업 후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종종 장래에 대한 불안감에 시달린다고 고백했다. 기자는 행사장에서 만난 교포 학생들의 뛰어난 영어실력이 아니라, 그들이 가진 자신감과 열정, 창업정신이 부러웠다. 젊은날 창업의 실패를 훗날 성공의 거름이라며 격려하는 문화도 부러웠다. 누가,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어낼까. 굳이 대학을 졸업하지 않아도 세계적 기업을 일궈내고, 등록금을 낼 돈이 없어도 열심히만 한다면 어떻게든 대학을 졸업하는 사회, 대기업ㆍ공무원ㆍ사법고시가 아니라 벤처 창업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회를 만들어주지 못하는 선배 세대의 미안함도 겹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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