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외유 중 전례없는 사표 … 통치권 상처 낸 김준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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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퇴의사를 밝힌 김준규 검찰총장이 4일 오후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에서 열린 확대간부회의를 마친 뒤 청사를 떠나고 있다. [강정현 기자]

김준규 검찰총장이 4일 “검경 수사권 조정 합의안이 국회에서 파기된 데 대해 책임을 지고 총장직에서 사퇴하겠다”며 법무부에 사표를 제출했다. 취임(2009년 8월 20일) 이후 22개월여 만이다. 사정기관 ‘빅4’(국정원장·검찰총장·경찰청장·국세청장) 중 하나인 검찰의 최고책임자가 대통령 외유 중에 사표를 제출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책임을 지겠다’는 말과는 달리 검찰 총수로서 무책임한 행동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정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사정기관의 최일선 기관장은 책임이 막중하기 때문에 임명권자 부재 시 사표를 낼 자유도, 내지 않을 자유도 사실상 없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특히 지난 1일 세계검찰총장회의에 참석한 이명박 대통령이 “그런(사표를 내고 나가는) 나쁜 전통을 만들지 말고 남아서 사태를 책임지고 수습하라”고 한 지시를 정면으로 어겼다는 얘기도 나온다. 인사권자의 결정을 듣지 않아 통치권에 상처를 입혔다는 것이다. 현 정부가 사정기관장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음을 반증한 것이라는 분석마저 나온다. 청와대와 국무총리실 측은 불쾌감을 숨기지 않았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평창 유치 지원 활동을 벌이고 있는 이 대통령은 사표 제출 소식을 보고받고 “아무런 표정 변화도, 말도 없었다”고 박정하 청와대 대변인이 전했다. 청와대 참모들은 “이 대통령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 참모는 임기가 불과 40여 일 남은 걸 두고 “내일모레 죽을 사람이 응급실에서 인공호흡기 떼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했다. 김황식 국무총리도 “정부에서 충분히 논의를 거쳐 국회에서 이뤄진 법률 개정에 대해 합의를 깬 것이라고 언급한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고 말했다고 유성식 총리실 공보실장이 전했다.

 이에 앞서 김 총장은 이날 오후 대검찰청 8층 회의실에서 가진 회견에서 “이번 사태의 핵심은 (형사소송법 절충안의 내용이) 대통령령이냐 법무부령이냐의 문제라기보다, ‘합의의 파기’에 있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김 총장의 발표문 요지.

 “ 장관들과 검찰총장, 경찰청장 등이 최고 국가기관 내에서 합의를 해 문서에 서명까지 하고 국민에게 공개한 약속마저 안 지켜진다면 어떤 합의와 약속이 지켜질 수 있겠느냐.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Pacta Sunt Servanda·팍타 순트 세르반다’(※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라틴어)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면 저라도 책임지겠다. 검찰총장의 마지막 권한 행사로 여러분들의(※사표를 낸 홍만표 대검 기획조정부장과 사의를 표명한 김홍일 대검중수부장 등 대검 간부 4명) 사직서와 사퇴 의사를 모두 반려한다. 저축은행 비리 수사의 끝장을 봐 달라. 사퇴는 이미 결심했었다. 국제회의장에 웃으며 서 있었지만, 속으로는 ‘간’이 녹아 날 정도로 힘들었다.”

글=조강수·고정애 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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