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 3불 시대’수퍼 리치를 모셔라 … 은행 vs 증권사, PB로 한판 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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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지난달 28일 국내 금융계에 ‘사건’이 발생했다. 우리투자증권이 외국계 투자은행(IB)인 한국메릴린치증권의 프라이빗뱅킹(PB) 사업부문을 사들였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국내 증권뿐 아니라 은행업계 관계자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전까지 국내 증권사가 외국 금융사의 PB 사업을 통째로 인수한 사례가 없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관리하는 고객 자산만 1조원에 달한다.

김창규·하현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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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투자증권은 서울파이낸스센터(SFC)에 있는 한국메릴린치의 PB직원(11명)뿐 아니라 고객까지도 고스란히 넘겨받게 됐다. 이 회사는 지난해 11월 서울 강남파이낸스센터에서 10억원 이상 금융자산 보유 고객을 대상으로 자산관리 서비스(프리미어 블루)를 시작했다. 이번에 인수한 PB센터를 두 번째 ‘프리미어 블루’로 새 단장한다.

 김원규 우리투자증권 WM사업부 대표는 “거액 자산가가 지속적으로 늘고 있어 이들을 위한 서비스를 확대하고 있다”며 “PB사업은 우량 고객을 얼마나 확보하느냐에 성패가 달렸는데 이번 인수는 우량 고객을 한번에 확보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국민은행은 서울 강남파이낸스센터에 있는 두 개의 PB센터를 하나로 합치는 작업을 하고 있다. 금융자산이 30억원 이상인 ‘수퍼 리치’ 고객을 위한 서비스를 위해서다. 이 은행은 그동안 금융자산 5억원 이상인 고객에게 PB 서비스를 제공해 왔지만 이번에 고액 자산가를 겨냥한 서비스를 대폭 강화했다. 8월 29일 문을 여는 이곳에는 부동산·세무·외환·기업 전문가가 상주한다. PB인력도 기존(4~5명)의 두 배가 넘는 12명을 배치할 계획이다. 상담하러 온 고객에겐 4명의 전문가(부동산·세무·외환·기업)가 한 팀이 돼 조언한다. 정진석 국민은행 WM사업부장은 “고액 자산가를 대상으로 한 증권사의 PB 강화 움직임이 신경 쓰인다”며 “그동안 PB업무가 상품 판매 위주였는데 이제는 컨설팅 기능을 대폭 강화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증권사와 은행이 ‘PB전쟁’을 벌이고 있다.

 먼저 전투를 걸어 온 건 증권사다. 그동안 국내 자산가에겐 ‘PB=은행, 주식=증권사’라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증권사는 최근 은행의 영역으로 인식돼 온 PB 분야에 속속 뛰어들며 이 등식을 깨뜨리고 있다. 특히 증권사는 PB 사업을 돈 주고 사들이거나 은행이 선점했던 서울의 핵심 지역을 공략하며 ‘PB전쟁’의 불길에 기름을 붓고 있다.

 최근 1년 새 증권사가 새로 문을 연 PB센터는 10곳이다. 올해 개설 예정인 곳도 4~5개나 된다. 하지만 KB·우리·신한·하나은행 등 주요 은행이 문을 연 PB는 한 곳에 불과하다. 증권사는 금융자산 10억원 이상인 고액자산가 위주로 PB를 확대하고 있다. 삼성증권은 지난해 6월 서울 강남파이낸스 빌딩에 고액 자산가를 위한 PB브랜드 SNI를 선보이며 은행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후 지난해 10월 SNI호텔신라, 11월 SNI코엑스인터컨티넨탈, 올 3월엔 SNI서울파이낸스센터 등을 잇따라 열었다. 대우증권은 이달 초 맞춤형 서비스를 강화하기 위해 PB본부를 신설했다. 이미 각각 20~30여 개의 PB센터를 보유한 주요 은행도 이에 맞서 기존 PB센터를 대형화하며 고액 자산가를 위한 서비스를 확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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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B인력 쟁탈전도 거세지고 있다. 심지어 인력을 둘러싼 갈등이 소송에까지 이르기도 한다. 한 은행 인사 담당 임원이 요즘 최대 고민이 ‘PB의 이직’이라고 말할 정도다. 지난 3월 서울파이낸스센터 25층에 있는 신한은행 PB센터에서 일하던 PB 3명이 같은 건물 20층에 있는 삼성증권 PB센터(SNI)로 자리를 옮겼다. 신한은행은 곧바로 삼성증권에 항의했고 “영업비밀을 소상히 아는 이들이 퇴직 시점부터 3년까지는 같은 장소에서 고객 업무를 담당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서울중앙지방법원에 가처분소송을 냈다. 이 소송은 현재 진행 중이다.

 PB센터가 크게 늘다 보니 PB인력의 ‘몸값’은 ‘금값’이 됐다. 이 때문에 PB센터를 늘렸지만 PB인력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증권사가 속출하고 있다. 한 은행의 PB는 “증권사가 수억원의 웃돈(계약금)을 제시하며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며 “증권사는 혼자서 잘하면 개인 성과로 평가받지만 은행은 팀 단위로 평가받기 때문에 증권사 제안에 솔깃한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한 증권사 PB센터장은 “과거에 스카우트할 때도 거액을 제시했지만 ‘PB=은행’이란 인식 때문에 은행 PB가 증권으로 잘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며 “하지만 요즘 고객이 증권 쪽으로 움직이니 PB도 함께 이동하는 것”이라며 최근의 분위기를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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