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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인·가객들이 만든 풍류 세계, 국악의 뿌리 지킨 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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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호 29면

한국 근대문화유산을 찾아온 지 어언 2년째다. 그간 근대의 스펙트럼과도 같은 각 분야의 현장을 취재하고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때마다 아쉬움이 남았다. 서양으로부터 이식된 근대의 풍경 말고 우리의 자생적인 근대문화 풍경은 없는 걸까. 전통과 근대의 접점에서 한국인의 혼이 깃든 소리와 선과 색은 어떤 양상을 띠었던 걸까. 그래서 국악과 전통미술 공간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사색이 머무는 공간 <65> 정읍 영모재와 아양정 터

달하 노피곰 도다샤 머리곰 비취오시라.
백제 가요 ‘정읍사’의 고장에서 풍류(風流)를 만났다. 신라 때 최치원은 ‘나라에 있는 현묘(玄妙)한 도’를 풍류라고 정의했다. 오늘날 우리는 ‘멋스럽고 운치 있게 노는 일’을 풍류로 알고 있다. 이런 인식은 조선후기 새로운 예술 수용층으로 부상한 중인(中人)들이 남긴 문화유산이다. 당시 예술적 소양을 지닌 사대부나 중인 부유층이 모여 시를 짓고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하며 즐기던 예술행위를 풍류라 불렀다. 풍류를 즐기는 이를 풍류객, 혹은 율객(律客)이라 했고 거문고를 타는 이를 금객(琴客), 노래하는 이를 가객(歌客)이라 했다. 풍류방에서는 거문고와 가야금·양금·해금·대금·단소·장구 등의 악기를 합주하거나 독주했다.

대문부터 방·대청까지 민화와 주역 묘사
과학기술의 발달이 가져온 산업화는 특수를 보편으로 만들었다. 신(神) 중심적 사유에서 인간 중심적 사유로의 전환이 근대정신이다. 불교의식의 노래이던 영산회상(靈山會相)에서 노래가 빠진 대신 기악곡으로 바뀌어 여러 변주곡이 만들어졌다. 종교음악의 세속화였다. 전국에 동호회가 생기고 대중적 향유로 이어졌다. 거문고 중심의 악기 편성은 줄풍류(乼風流)라는 용어를 낳았다. 줄풍류가 곧 풍류의 대명사다. 서울·경기의 경제풍류, 지방의 향제풍류는 현대에 만들어진 용어다. 그냥 풍류면 족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아양계비 앞에 선 남상숙(오른쪽)·조세린(왼쪽)교수와 김문선 샘소리터 주인. 신동연 기자

기악곡 가운데 상령산은 초기의 영산회상을 일컫는다. 상령산의 음역을 높여 변주한 것이 중령산이며 중령산을 빠르게 하고 가락을 덜어낸 것이 세령산이다. 세령산을 한층 더 빠르게 하고 가락을 더욱 덜어낸 것이 가락덜이인데, 가락제지라고도 한다. 전혀 감이 잡히지 않지만 연주곡을 들어보면 금방 이해된다.

한국 사람보다 동양학과 우리 전통음악을 더 잘 이해하고 있는 조세린(Jocelyn Clark·미국) 배재대 교수와 영모재(永慕齋)를 찾았다. 풍류는 일제 때 한국 문화 말살정책으로 맥이 끊길 위기에 처해 있었다. 하지만 민간에 깊숙이 뿌리내린 한국인의 소리를 일본인들이 지워버리지는 못했다. 삶 자체가 풍류였던 여러 명인의 한결같은 풍류사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모재는 한국 풍류의 본고장인 호남의 풍류를 이해하는 출발점이다. 구한말 강원도 평창군수를 지냈던 정읍의 부호 김평창(본명:김상태)이 1885년 죽산 안씨 사당을 사들여 1915년 현재의 모습으로 개축한 정자다. 개축하면서 약 7m 높이의 솟을대문 벽면에 다채로운 민화를 그려 넣었다. 대문 앞에 영생의 신화가 펼쳐진다. 대문 기둥머리 위, 공포(栱包) 단면에 두 마리 토끼가 절구질을 하고 있다. 달나라 계수나무 위에서 불사약을 찧는 모습이다. 이 계수나무는 아무리 도끼를 휘둘러 찍어내도 절대 쓰러지지 않는다고 한다. 한 쌍의 옥토끼가 찧는 불사약의 효험 때문이다. 문을 열면 두 마리의 학(鶴)을 타고 피리를 불며 하늘을 나는 두 신선(神仙)이 나타난다. 좌우 벽면에 각각 두 마리의 현무와 해태가 있다. 물론 암수를 표현한 그림이다. 봉황과 호랑이도 짝을 이뤘다. 음양(陰陽)의 공간이다.

마당 너머로 온돌방과 대청마루를 갖춘 본채는 곧 날아갈 것만 같은 풍광이다. 4개의 추녀 끝을 받치고 있는 활주(滑走)가 보인다. 아래쪽 돌기둥 밑에 빙 둘러서 주역 팔괘(八卦) 문양을 새겼다. 우주를 떠받들고 있는 공간임을 뜻한다. 대문의 음양, 본채 추녀 밑 활주의 팔괘는 매우 상징적이다. 정자 안에서 노니는 사람은 태극(太極), 곧 우주의 본체를 머금은 고귀한 존재가 된다. 사람으로 드러난 태극을 인극(人極)이라고 하던가.

김평창은 이 정자에서 당대의 명인들과 가객, 기생들을 불러들여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정읍 예기조합(기생학교) 소속 기생들에게 기예를 가르쳤다는 주장이 있지만 앞으로 명확한 고증을 할 필요가 있다.

대청마루에 김평창의 둘째아들 김기남(金基南·1889~1950)의 편액이 걸려있다. 김기남은 여기서 가까운 초산(楚山) 아양동천에 두승산을 바라보고 아양정(峨洋亭)을 지은 인물이다. 아양정에서 풍류객들의 모임인 아양계(峨洋契)를 조직하고 즐기던 풍류가 오늘날의 줄풍류다.

정읍 풍류의 맥을 잇고 있는 김문선(55) ‘샘소리터’ 주인, 한국예술종합학교 남상숙(62) 교수가 아양정 터 답사의 길라잡이가 되어 주었다. 조선조 궁중음악의 단절과 속악원보의 저자인 남 교수는 국악계에 이슈가 되는 논문들을 발표한 바 있다. ‘아양’이라는 정자 이름은 지음(知音:속마음을 알아주는 친구)의 고사(故事) 주인공 백아와 종자기의 일화에서 유래한다. 백아가 높은 산에 오르고 싶은 마음으로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는 옆에서 “높고도 높다, 태산처럼(峨峨乎若泰山!)” 이렇게 감상평을 했고, 백아가 흐르는 강물을 생각하며 거문고를 타면 “넓고도 넓다, 드넓은 강물처럼(洋洋兮若江河)” 이렇게 감상평을 했다. 그런 종자기가 죽으매 백아는 거문고를 부수고 줄을 끊어 다시는 타지 않았다.

전추산 단소, 신쾌동 거문고, 편재준 퉁소
산자락이 둥그렇게 감아 돈 아양동천 가운데 ㄱ자 형태의 아양정이 자리 잡았고 좌우에 세심정(洗心亭), 이락정(二樂亭)이 있었다고 한다. 정읍 예기조합 기녀들에게 기예를 가르쳤던 전추산(全秋山·1888~1965)은 이곳에서 많은 풍류가객들을 길러냈다. 전남 구례 풍류의 김무규, 익산의 강낙승, 정읍의 김환철·이기열, 부안의 정경태 등이 그의 제자다. 단소 부는 솜씨가 천하일품이어서 죽신(竹神) 소리를 듣던 전추산은 일생 동안 오직 묘한 음률을 찾아 신명을 바쳤던 예인의 표상이다.

초여름 잡초 우거진 아양동천에는 바람 한 점 없다. 죽신 전추산의 단소 소리, 전설적인 풍류객 신쾌동의 거문고 소리는 음원과 악보가 남아 일부분이라도 들어볼 수 있지만 진짜 날아오는 새소리를 냈다는 맹인(盲人) 편재준의 퉁소 소리는 다시 들어볼 재간이 없다. 한번 흘러가면 다시 오지 않는 시간의 섬에 소리의 무늬로 새겨졌을까. 우주는 모든 소리를 함장(含藏)한다. 소우주인 인간의 군상 가운데 어느 명인이 있어 그 소리를 다시 일깨워낼 것인가. 하늘은 늘 적합한 사람을 기다려 그로 하여금 당대를 울게 만든다.

한국전쟁 때 아양정 풍류방 주인장 김기남이 행방불명되면서 정자들이 사라졌다. 지금은 사랑채 옆에 있었다는 아양계원 비석 하나만 덩그렇게 남았다.

“‘예를 돈과 바꾼 적이 없고 푼전(分錢)을 몸에 지녀 본 바 없다’던 전추산 선생, 제자들에게 ‘학비는 두고 양심만 가져오게’라고 했던 신쾌동 선생, ‘예술이 먹고사는 방편이 되면 빛이 안 난다’고 한 김용근 선생, 멀리까지 가서 가르치고서도 단 한 번도 노자를 달라고 한 적이 없었던 김윤덕 선생 등 가난했던 시절에도 넉넉하기만 했던 멋쟁이 풍류인들의 이야기 속에 풍류정신이 들어 있답니다. 계보가 어떻게 내려왔건, 악보가 서로 일치하건 안 하건, 장단의 틀 안에서 유연성을 가지고 서로 어우러지며 나눔의 미덕으로 지금까지 이어진 살아있는 전통이 풍류입니다. 생활의 한 부분으로 삶의 질을 높일 수 있고 나눔을 실천하는 문화가 풍류입니다.” 남 교수는 풍류정신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복원해야 할 문화유산이라고 강조한다.

아양정 터를 내려오며 영모재를 잘 활용해 국악의 명소로 만들 수 없을까를 생각했다. 그러나 장소보다 역시 사람이다.

“요즘 신문기사도 독자의 니즈(needs:필요성)에서 원츠(wants:욕구)로 바뀌어가는 추세라지요. 국악도 사람들이 복잡하고 지루하게 여기는 산조와 평조에 첼로나 바이올린을 뒤섞어 퓨전음악을 내놓고 있어요. 고유의 깊은 맛이 그냥 깨져버리죠. 심각해요. 클래식은 서양음악이나 국악 모두 반복적인 듣기 훈련이 필요해요. 자주 듣다 보면 익숙해지고 대중음악과는 또 다른 맛이 있거든요. 제가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정통 가야금 병창을 고집스럽게 배우고 있는 건 국악을 외면하는 한국인들에게 외국인도 저렇게 하는데 우리는 지금 뭐 하는가? 그렇게 자극하려는 뜻도 있답니다.”

1992년부터 지금까지 가야금을 익혀오고 있는 조세린 교수는 우리 국악의 실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문제점까지 지적한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전북 도립국악원 거문고 수석 위은영씨는 대금 이항윤, 양금 김선, 피리 박승희씨와 함께 신쾌동 악보를 가지고 전주 풍류를 갈고 닦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자발적인 풍류운동이 일어나면 자연스럽게 품격 높은 생활문화로 이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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