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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서 싸우리라” … 자결 대신 항일 택한 양명학자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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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호 30면

강화도 길상면 온수리의 성공회 성당, 1900년대 초에 건립됐다. 망명길에 오른 이건승은 온수리에 사는 신주현의 집에서 망명 첫날 밤을 보냈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절망을 넘어서
②떠나는 사람들-강화학파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순종 3년(1910) 8월 22일 일본이 강제로 체결한 조약의 정식 명칭은 ‘일한병합조약(日韓倂合條約)’이었다. 합방(合邦)이 두 나라가 합친다는 뜻이라면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90CE>)가 고안한 병합이란 말은 강국이 약국을 삼킨다는, 일제의 시각이 그대로 담긴 말이었다. 이렇게 대한제국은 조선 개창부터 치면 518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그런데 일제가 정식으로 순종의 통치권을 빼앗은 날은 일주일 후인 8월 29일이었다. 그 일주일 사이에 있었던 조치는 크게 셋이다. 하나는 일제의 물적 수탈 기반을 만드는 것인데, 8월 23일 법률 제7호로 토지조사법(土地調査法)을 제정했다. 이후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으로 막대한 국·공유지 및 신고 거부, 또는 누락 토지를 강탈한다. 둘째로 민중의 반발을 누르는 조치였다. 8월 24일에는 내각(內閣) 고시로 정치에 관한 집회와 옥외 대중 집회를 금지한다고 포고했다. 위반자는 구류 또는 과료(科料)에 처한다고 협박했다. 셋째가 지배층 회유였다. 8월 24일 대원군의 장남 완흥군(完興君) 이재면(李載冕)을 이희(李熹)로 개명하고 흥친왕(興親王)으로 봉한 것을 비롯해 많은 벼슬아치를 승진시키고, 훈장을 주었으며, 이미 죽은 자에게도 벼슬을 추증하거나 시호를 내렸다. 민중 억압과 양반 사대부 회유가 일제의 한국 점령 키워드였다. 양반 사대부가 민중과 결합해 투쟁에 나서면 식민 통치가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 가지 조치를 완료한 8월 29일 드디어 일제는 순종으로부터 통치권을 양도받는 형식으로 대한제국을 완전히 집어삼켰다. 순종이나 고종 그 누구도 동의한 적 없는 불법 양위권 탈취였다. 같은 날 일왕은 병합 조서를 내리는데 여기에서도 대한제국 황실과 대신들, 양반 사대부들을 우대한다고 규정했다. 고종을 이태왕(李太王), 순종을 이왕(李王)이라 칭하고, 고종의 아들 이강(李堈)과 대원군의 장남 이희(李熹)를 공(公)으로 삼았다. 또한 고종·순종에게 전하(殿下)라는 경칭을 쓰게 했다. 고종과 순종을 대공(大公)으로 격하시키려 했던 이완용의 구상보다는 나은 대접이었다. 일왕은 이날(29일) 발령한 칙령 제318호에서 ‘한국이란 국호를 다시 조선이라 칭한다’고 환원시켰다. 황제국이었던 대한제국을 제후국으로 강등시킨다는 의미였다.

1 조선총독부. 일제는 한국 강점 후 일본 헌법을 적용하지 않고 대권에 의해 통치한다고 규정하고 조선총독부를 설치했다. 2 금책. 흥선대원군의 장남인 완흥군 이재면을 흥친왕에 봉한다는 내용의 금책.

같은 날 칙령 319호는 ‘조선총독부를 설치한다. 조선 총독을 두어 (천황의) 위임 범위 내에서 육군과 해군을 통솔하여 일체의 정무를 통할(統轄)하게 한다’고 규정했다. 일왕은 “(조선) 민중은 직접 짐(朕)의 위무 아래에서 그 강복(康福)을 증진할 것”이라고 말했으나 이 역시 사기였다. 한국민은 일본 헌법의 적용 대상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조선총독부 설치령은 이미 6월 3일 일본 내각회의에서 결정한 것을 추인한 데 지나지 않았다. 일본 내각은 6월 3일 ‘한국에 대한 시정방침(韓國に對する施政方針)’을 결정해 한국에는 일본 헌법을 시행하지 않고 대권(大權)에 의해 통치하기로 결정했다. 대권이란 헌법이 아니라 일왕의 자의에 의해 다스린다는 뜻이다. 그래서 천황에 직속된 조선총독이 대만처럼 일체의 입법·사법·행정권을 갖게 되었다. 일본 헌법을 적용하면 한국에서도 총선거를 실시하고, 그 결과에 따라 내각을 구성해야 했기에 총독제를 적용한 것이었다.

일왕은 8월 29일 “(한국) 백성이 그 울타리에서 편안치 못하니 공공의 안녕을 유지하여 민중의 복리를 증진함을 위한다”고 표방했지만 일본 헌법의 적용 대상에서도 제외된 한국 민중은 객관적인 일제의 노예였다. 이날 일왕은 칙령 제327호에서 “조선에서 하는 임시 은사(恩賜)에 충당하기 위하여 정부는 3000만 환(<571C>)에 한하여 5분(分) 이자를 붙여 국채를 발행할 수 있다”고 정했다. 이는 황실령(皇室令) 제14호의 조선귀족령(貴族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조치였다. 3000만 환의 거금으로 황실과 귀족으로 봉한 자들과 매국 대신들, 그리고 각지의 유력한 양반 사대부들에게 은사금을 주겠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대원군의 장남 이희, 순종의 장인 윤택영 같은 왕실 인사들, 총리 이완용과 조중응 같은 매국 대신들은 물론 지방의 일부 유력한 양반 사대부들도 일제가 하사할 은사금을 기다렸다. 작위와 은사금은 10월 7일 내려졌다. 대한제국은 완전히 멸망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보름 전쯤인 1910년 9월 24일 새벽. 이건창의 동생인 경재(耕齋) 이건승(李建昇)은 선조들의 위패가 있는 강화도 집의 가묘(家廟)로 올라갔다. 할아버지 충정공(忠貞公) 이시원(李是遠)의 위패가 있는 곳이었다. 이시원은 소론계 인사로서는 드물게 정2품 정헌대부(正憲大夫)에까지 올랐지만 고종 3년(1866)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점령하자 78세로 자결한 인물이었다. 막내 희원(喜遠)에게 집안일을 맡기고 동생 지원(止遠)과 음독한 후 담소하며 죽어갔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이건승이야말로 자결의 길을 택하기 좋았다. 선조들의 뒤를 따른다는 명분으로 먼저 간 자식 뒤를 따를 수 있었다.

이건승이 을사년(1905) ‘황현에게 보낸 편지(與黃梅泉書)’에서, “지난해에 아들이 죽고 금년 봄에 며느리마저 죽어 늙은 부부는 눈물만 흘리며 서로 마주보고 있을 따름입니다”라고 토로했듯이 고종 41년(1904) 8월 외아들 석하(錫夏)가 후사마저 남기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고, 이듬해에는 며느리마저 세상을 떠났다. 이건승은 “저는 공(公)적으로 근심스럽고 분노하지만 죽지 못하고, 사(私)적으로도 참혹한 독을 겪었지만 죽지 못했습니다”라고 한을 토로했다. 그러나 맥 놓고 질긴 목숨을 이어간 것은 아니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건승, 기당(綺堂) 정원하(鄭元夏:1855~1925), 문원(紋園) 홍승헌(洪承憲:1854~1914) 세 사람의 소론계열 양명학자는 목숨을 끊기로 약조하고 간수를 준비했다. 그러나 가족들이 간수를 발견해 엎어버렸다. 그러자 정원하는 자결하기 위해 칼을 집으려 했다. 가족들이 먼저 칼을 잡는 바람에 정원하는 칼날을 잡았다. 정원하의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데도 가족들은 통곡하면서 손잡이를 놓지 않았다. 놓았다가는 목이나 팔목을 그어버릴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칼날을 잡은 한쪽 손이 불구가 되었다. 그렇게 을사년을 살아남아 경술년(1910)을 맞이한 것이다.

이후 세 선비는 다시는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기로 결의했다. 그래서 매천 황현의 자결 소식을 듣고도 따라 죽지 않았다. 매천에게는 매천의 길이, 자신들에게는 자신들의 길이 있다고 여겼다. 세 번이나 약사발을 입에 댔다 떼었다는 매천의 길보다 쉽지 않은 길이었다. 살아서 일제에 맞서는 선비의 길이었다.

9월 24일 새벽! 이건승은 그 길을 떠났다. 집을 나섰지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걸음걸음마다 되돌아보며 마을문을 나선다(步步回頭出洞門)”는 시를 남겼다. 이웃 동네 마실이라도 가듯 대지팡이 하나 짚은 단출한 차림이었다. 일경(日警)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걸어서 강화도 길상면 온수리에 사는 신주현(愼周賢)의 집에 도착했다. 온수리 언덕 위에는 영국 성공회에서 세운 성당이 우뚝 서 있었다. 그날 저녁 이건창의 아들이자 유일한 혈육인 이범하(李範夏)가 이불을 들고 찾아왔다. 돌아오기 힘든 길을 떠나는 삼촌에게 이불 가지나마 가져다 주기 위한 것이었다. 201년 전인 숙종 35년(1709) 하곡 정제두(鄭齊斗:1649∼1736)가 스스로의 유배지로 강화를 선택하고 입도(入島)한 이후 줄곧 지켜왔던 선비들의 처신이었다. 주자학과 노론이 주류인 세상에서 비주류로 일관했지만 양반 사대부임에는 틀림없었다. 선비의 도리, 지배층의 도리를 다해야 했다. 황현이 죽기 전 강화도 이건창의 묘소를 참배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9월 26일 이건승은 강화 승천포 나루에서 배를 타고 개경으로 올라갔다. 개경에는 사헌부 집의와 홍문관 시강(侍講) 등을 역임한 원초(原初) 왕성순(王性淳)이 있었다. 왕성순은 이듬해(1911) 중국 상해에서 황현의 유고 문집 매천집(梅泉集)을 간행하고, 김부식·박지원 등 고려와 조선의 문장가 10인의 문장집인 여한십가문초(麗韓十家文<9214>)를 1921년 한묵림서국(翰墨林書局)에서 발행하기도 하는 창강 김택영의 문인이었다. 개경의 양명학자 왕성순 집에서 이건승은 홍승헌을 기다렸다. 홍승헌은 보재 이상설의 고향이기도 한 충청도 진천에서 주변을 정리하고 올라오기로 약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