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칼춤 추는 공정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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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심상복
논설위원

공정거래위원회가 칼춤을 추고 있다. 그런데 그 춤, 세련되지 못했다. 막춤에 가깝다. 근처에서 잘못 얼씬대다간 피 보기 십상이다. 대학 등록금이 비싸고, 대학들이 등록금을 엉뚱한 곳에 쓴다고 하자 김동수 공정거래위원장은 지난 15일 “등록금 담합 의혹에 대해 조사하고 있다”고 국회에서 답변했다. “현재 조사가 진행 중이고 철저히 조사하겠다”는 그의 말만 들으면 강도 높은 조사라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실무자들의 반응은 뜨악하다. 그런 일(담합)이 없는지 늘 하는 모니터링 정도라는 것이다. 본격적인 조사와는 거리가 멀다. 모르겠다, 위원장의 답변을 계기로 칼같은 조사에 나섰는지는. 올봄 청와대의 뜻에 맞춰 기름값을 억지로라도 내리게 정유사들의 팔을 비튼 걸 보면 가능성은 있다.

 17일에는 연예기획사의 ‘표준전속계약서’에 미성년 아이돌의 학습권과 인격권을 보호하는 조항을 추가했다. 노예계약서 운운하며 말이 많자 내놓은 대책이다. 여기에 ‘과다 노출과 선정적 표현을 요구할 수 없다’는 문구도 들어 있다. 어느 정도가 과다 노출이고, 선정적 표현은 또 뭘까. 요즘 아이돌 그룹의 춤과 노래에서 과연 이걸 가려낼 수 있을까. 치마 길이로 잴까, 아니면 가슴이 파인 정도로 판단할까. 코에 걸면 코걸이요, 귀에 걸면 귀고리다. 연예기획사가 밉다고 이런 식으로 모호한 규제를 하면 시빗거리만 양산된다.

 조사를 하고 발표를 하는 시점도 참 묘하다. 20일에는 CJ제일제당과 대상이 고추장 가격을 담합했다고 발표했다. 두 회사 임원들이 지난해 3월 26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만나 ‘대형마트에서 파는 고추장 가운데 행사 제품은 30% 정도만 할인해서 팔자’고 짰다는 게다. 지난해 3월 행사 제품 할인율이 CJ는 47.5%, 대상은 51.8%였으나 석 달 뒤 할인율은 CJ가 38.5%, 대상은 37.0%로 낮아졌다는 것이다. 담합 행위를 적발하고 벌하는 것은 공정위의 가장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이 사건에도 의구심이 드는 구석이 있다. 1년도 지난 일을 왜 지금 발표하느냐다. 완벽한 조사를 위해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럴 수도 있겠다. 혹시 정부 정책에 자꾸 토를 달아서 혼을 낸 것은 아닐까. 정운찬 전 총리가 이끄는 동반성장위원회가 5년 만에 다시 추진하는 ‘중소기업 적합업종’ 선정 작업 말이다. 중소기업들이 고추장·두부·간장·된장 같은 식품류에도 대기업의 참여를 막아야 한다고 외치고, 두 고추장 대기업이 반대하자 손 좀 봐줬다는 소리가 들린다.

 이런 의혹이 괜히 제기되는 게 아니다. 공정위는 지난 5월 말 주유소들이 마음대로 거래 정유사를 바꾸지 못하도록 4대 정유사가 담합했다는 이유로 과징금 4349억원을 부과했다. 이들이 2000년 3월 ‘석유제품 유통질서 확립 대책반’ 모임을 가진 뒤 주유소를 관리해 왔다는 것이다. 11년 전 일을 지금 찾아내는 공정위의 기술이 놀라울 뿐이다. 이걸 뒤집어 보면 10년 이상 이런 담합 행위가 진행돼 왔지만 공정위가 묵인했다는 말이 된다. 물가관리 차원에서 정유사를 압박하려고 수년간 아껴놓은 보도(寶刀)를 이번에 끄집어냈다는 비난이 나오는 이유다. 구태를 벗고 세련되게 기동하는 공정위를 보고 싶다.

심상복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