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정치권 포퓰리즘과 허창수 전경련 회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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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반값 등록금 정책이 길을 잃었다. 기세등등하게 나섰던 여야 모두 발을 빼는 모양새다. 한나라당은 장학금을 늘리는 방안으로 기울고, 민주당은 당장 시행하기 곤란하다는 반응이다. 구체적인 재원마련 계획도 없고, 대학 구조조정 등 선후(先後)를 따지지 않은 채 즉흥적으로 덤벼든 결과다. 국민을 한껏 들뜨게 해놓고 발을 빼다니 그 후유증을 어떻게 감당하려는 건지, 참으로 무책임한 정치권이다.

 이런 정치권에 대해 엊그제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장이 “포퓰리즘 하는 사람들이 잘 생각하고 내놓는 게 아니라 즉흥적으로 만들고 있다”고 질타했다. 옳은 말이다. 그는 또 중소기업에 돈을 주기보다는 “연구개발 투자 등 경쟁력을 높이게끔 도와줘야 한다”고 했고, 감세(減稅)하면 “기업들이 투자와 고용 창출을 많이 한다”고 역설했다. 이 역시 맞는 방향이다. 본란도 법인세만이라도 내려야 하고, 돈을 나눠주는 식의 동반성장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지적해 왔다. 허 회장의 발언은 재계의 수장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얘기다. 내년 선거를 앞두고 포퓰리즘적 공약이 무더기로 쏟아질 것을 경계한 것이다.

 그러나 허 회장의 지적이 제대로 먹혀들지 의문이다. 여론이 반(反)기업적인 정책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이는 재계가 오히려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친(親)기업을 표방한 정부가 요즘 반(反)시장적 정책을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일감 몰아주기 과세(課稅), 회사의 사업기회 유용금지, 준법지원인제도, 연·기금 주주권 행사 등은 그대로 시행될 참이다. 반면 오래전부터 추진해온 금(金)·산(産)분리 완화와 감세 등은 무산될 판국이다. 이렇게 되면 기업이 투자 의욕을 잃고, 나라 경제가 심각한 타격을 받을 것이란 주장은 전혀 먹혀들고 있지 않다. 재계는 바로 이 점을 깊이 성찰해야 한다.

 기업은 사회적 산물이다. 반기업 정서가 팽배하면 포퓰리즘이 기승을 부릴 수밖에 없다. 기업에 적대적인 정책과 법이 만들어지면 재계도 손실이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기업이 국민의 사랑을 받도록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그 길은 경영학의 큰 스승인 드러커 교수가 얘기한 사회책임경영이다. 신사업을 모색하고 핵심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기보다는 와인수입상, 커피점, 제과점 등에 천착해선 안 된다. 우월적 지위를 활용해 중소기업의 기술을 탈취해서도 안 되고, 선물투자로 막대한 돈을 날리고 그림으로 비자금을 축적하는 일이 재연돼서도 안 된다. 그러면 재계에 오히려 손해라는 자성(自省)이 시급하다. “내 자식이 아니더라도 경영권을 줄 수 있다”는 STX 강덕수 회장, “내가 가진 부(富) 가운데 조금만 자식에게 물려주겠다”는 빌 게이츠의 말이 왜 감명을 주는지를 재계는 명심하길 당부한다. 이런 자성과 노력이 뒷받침됐다면 허 회장의 주장은 설득력이 강했을 것이다. 재계의 ‘통 큰 경영’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