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 외교관' 로버트 이건 "김정일 위원장에게 미군 포로 석방 요구했다"

미주중앙

입력

자신을 ‘대북 민간 외교관’으로 소개한 로버트 이건. 이건은 유엔주재 북한대표부 한성렬 차석대사와 형제 이상의 관계를 맺었다고 말했다.

로버트 이건(왼쪽 네번째)과 북한 외교부 관계자들이 뉴저지주 해켄색에 있는 이건의 레스토랑 앞에서 자리를 함께 했다. 이건의 오른쪽이 주유엔 북한대표부 한성렬 차석대사.

뉴저지주 해켄색에서 '커비스 BBQ'란 식당을 운영하는 로버트 이건(53)은 “미국과 북한의 외교적 갈등 해소를 위해 일하는 '민간 외교관’”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북한에 억류된 미군 포로 석방을 위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메시지를 전한 바 있으며 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해 주민들에게 구호 물품을 전달했다고 한다. 특히 주유엔북한대표부 한성렬 차석대사 등과 형제 이상의 관계를 유지하며 미국과 북한의 대화 창구 역할을 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지난해 북한대표부 외교관들과의 에피소드를 담은 '적과의 식사(Eating with the Enemy)'를 펴내기도 한 이건을 그의 식당에서 만났다.

-'민간 외교관’으로 활동하게 된 계기는.

“베트남전에 참전하고 싶었지만 종전이 선언되며면서 목표를 잃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됐다. 베트남에 억류된 미군 포로 석방을 위해 당시 유엔 주재 베트남 외교관들과 친분을 맺었다. 석방에는 실패했지만 많은 사람과 교류하는 기회가 됐다.”

-북한 외교관들은 어떻게 만나게 됐나.

“내가 미국과 베트남 간 관계 개선을 위해 민간 차원에서 활동하는 것을 알게 된 북한 외교관들이 먼저 접촉했다. 그들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연결책(Connector)’이 필요하다며 이를 부탁했다. 처음 만난 북한 사람이 한성렬 대사였다.”

1981년부터 ‘커비스 BBQ’를 운영해 온 이건이 세간의 주목을 받은 건 92년 친분이 있던 한 베트남 외교관이 그의 식당에서 미 망명 기자회견을 한 후다. 북한 외교관들도 이를 통해 자신을 알게 됐을 거라는 게 그의 추측이다.

-한 대사가 구체적으로 뭘 부탁했는가.

“1993년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자 미·북 관계는 살얼음판 같았다. 북한 외교관들이 나를 맨해튼 유엔본부 인근에 있는 호텔로 초대해 두 나라의 연결통로가 돼 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들은 나를 통해 미국이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었고, 나도 북한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뒤 당국에 전해 주기도 했다.

-당시 북한과 교류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두 나라의 관계를 개선하는 것이 나의 임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특히 한 대사하고는 통하는 점이 많았다. 나이가 같았고 똑같이 딸을 키우고 있었다. 무엇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점이 비슷해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그는 미국에서 보이는 않는 견제가 많았다. 나와 함께 있는 시간만이라도 마음을 편하게 해 주고 싶었다.”

-무엇을 하면서 함께 시간을 보냈나.

“낚시와 사냥을 하거나 농구·풋볼 등 뉴저지 인근 연고팀의 경기를 관람했다. 그도 한 가정의 가장이자 아버지임을 알게 돼 더욱 친근함이 느껴졌다. 한 대사도 나를 통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미국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됐다. 친교 문화부터 레스토랑에서 주문하는 법까지도. 그도 나를 통해 미국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얻었을 거라고 확신한다."

북한 외교부 관계자들과 친분을 쌓으면서도 미 정보 당국에는 1급 정보를 제공했다는 이건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콘돌리자 라이스·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보다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는 평가도 있지만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유일한 연결 창구’임을 내세운 것과 관련, 허풍이 심하다는 비난도 뒤따랐다.

-미국과 북한 사이에서 당신의 역할은 무엇이었나.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미·북 관계 개선을 위한 연결 통로를 만드는 것이 나의 임무였다. 이 과정에서 나라와 개인이 겪는 ‘이해의 충돌’이 끊이지 않았던 점이 가장 힘들었다. 미 정부는 적을 고립시키는 정책을 펼쳐 왔다. ‘동지는 가까이, 적은 멀리하자’는 것이 당국의 입장이다. 그러나 난 적은 동지보다 더 가까운 곳에 둬야 한다고 믿었다.

-한 대사는 적과 동지 가운데 무엇인가.

“미국은 이미 한 대사를 ‘적’으로 선언했다. 만약 그가 날 죽이기로 마음 먹었으면 난 지금 이 자리에 없을 것이다. 또 내 선택에 따라 많은 일이 달라졌을 수 있고. 적을 동지보다 가까이 두자는 생각으로 한 대사와 계속 만나면서 결국 친형제 이상의 관계를 유지하게 됐다.

-주로 어떤 내용의 대화를 나눴는지.

“일과 관련된 대화가 70% 이상을 차지했다. 미국의 외교·경제 정책, 각 정부 기관의 예산 등을 주제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특히 한 대사는 미 자본주의 시장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30%는 가족 등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는 항상 위험에 노출됐다. 만약 한 명이 위험에 빠지면 나머지 한 명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고 항상 인식하고 있었다. 안전을 위해선 서로의 내면까지 아는 것이 중요했다.

이건이 운영하는 식당 벽면은 북한 외교관들과 찍은 사진들로 가득 차 있다. 이 가운데 가장 눈길이 끄는 것은 2002년 11월 3일자 뉴욕타임스 기사가 담긴 액자다. 2002년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으로 미·북 관계가 급속히 악화된 가운데 이건과 한 대사의 대화에서 나온 “북한이 핵을 포기할 수 있다”는 내용이 뉴욕타임스에 실리면서 두 나라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한 대사와 뉴욕타임스의 인터뷰를 주선했다는데.

“부시 전 대통령이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 두 나라의 관계가 크게 나빠졌다. 이와 관련, 한 대사와 대화를 나누던 중 '북한이 핵을 포기할 수 있다'는 말을 듣게 됐다. 북한도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평소 친분이 있던 뉴욕타임스 필립 세넌 기자에게 한 대사를 소개시켜 줬고, 이 같은 내용이 보도되자 두 나라 간 대화가 재개됐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루트가 있다고 밝혔다. 한 대사를 통해서였나.

“한 대사는 미국에서 얻은 정보를 북한 당국에 전달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반면 박길연 대사는 김정일 위원장의 ‘조언자(Adviser)’였다. 나의 메시지는 박 대사를 통해 김 위원장에게 전달된 것으로 알고 있다. 미군 포로 석방 등 중요한 안건이 있을 때만 메시지를 전했다."

-전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 국가인 한국을 바로 보는 시선은.

“통일은 반드시 돼야 한다. 같은 말과 문화를 쓰는 민족이 총구를 겨눈다는 것은 슬픈 현실이다. 남북이 가진 인력과 자원이 합쳐진다면 엄청난 시너지 효과가 발휘될 수 있다. 미국·중국·러시아 등 강대국의 세력 다툼으로 한민족이 나뉘게 된 점은 정말 안타깝다. 평양에 레스토랑을 차리는 것이 꿈이다. 통일이 된다면 내 꿈이 현실이 될 가능성이 더 커질 수 있다."

정승훈 기자 star@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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