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22) 저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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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방문 2년 후인 1973년 5월, 중국을 찾은 키신저와 환담하는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김명호 제공]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는 키신저의 중국 체류 48시간 동안 17시간을 직접 대좌했다. 보안을 위해 녹음은 하지 않았지만, 궈자딩(過家鼎·과가정)이 두 사람의 대화를 숨소리 하나 놓치지 않고 기록했다. 후일 몰타공화국과 포르투갈 대사를 역임한 궈자딩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포로 심문과 휴전회담, 제네바회담 등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당대 최고의 영어 속기사였다.

키신저가 먼저 입을 열었다. “2차 세계대전을 치르며 서구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일본도 철저히 실패했다. 동·서가 진공 상태에 빠졌다. 미국은 쫓기다시피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곤란이 오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대외정책을 조정하려 한다.” 이어서 대만(臺灣)과 인도지나(印度支那), 중·미 관계 정상화에 관한 닉슨의 구상을 설명했다. 요점은 미군 철수였다. “미국은 2개의 중국과 대만의 독립을 지지하지 않겠다. 단, 대만 문제가 평화적으로 해결되기를 희망한다. 대만에 주둔하는 미군의 3분의 2는 인도지나 전쟁 때문이다. 미국은 전쟁을 끝내기로 결정했다. 임기 내에 병력 3분의 2를 철수시키겠다. 중·미 관계가 개선되면 나머지 철군은 당연하다.” 유엔 가입에 관한 문제도 거론했다. “다시는 중국을 고립시키거나 질책하지 않겠다. 유엔에서 중국의 지위 회복을 지지하겠지만, 대만 대표 축출에는 앞장서지 않겠다.”

저우언라이가 응수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국지전이 그치지 않았다. 미국은 도처에 손을 뻗치고, 소련은 황급히 추격하느라 정신 나간 사람 같았다. 결국 미·소 양국은 곤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세계는 긴장과 동란이 그칠 날이 없다”면서 며칠 전 닉슨이 캔자스에서 한 연설을 상기시켰다. “닉슨 대통령이 세계는 군사경쟁에서 경제경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말을 했다. 경제확장은 군사확장을 야기한다. 그의 말대로라면 긴장과 동란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 중국 경제는 낙후돼 있다. 강한 경제력을 갖추는 날이 와도 우리는 초강대국을 추구하지 않겠다. 새로운 방향으로 세계를 향해 뻗어나가겠다.”

저우언라이가 보기에 키신저는 닉슨이 캔자스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베이징에 오기까지 키신저의 행적을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담이 끝난 후 복사본을 드리라고 통역에게 지시했다. 키신저는 고맙다며 계면쩍은 표정을 지었다.

대만 문제에 관한 한 저우언라이의 입장은 단호했다. “대만은 1000년 이상 중국 땅이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미국이 대만을 에워쌌다. 대만에 주둔하는 미군과 군사시설은 철수함이 마땅하다. 닉슨 대통령이 우리를 향해 한 말들을 중·미 관계의 정상화를 요망하는 것으로 간주하겠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와 체결한 모든 조약도 파기해야 한다.” 두 사람의 1차 회담은 밥 먹는 시간을 빼고 7시간 동안 계속됐다.

첫날 회담을 마친 저우언라이는 오밤중에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을 찾아갔다. 저우언라이의 보고가 대만에 미군 일부를 남겨두겠다는 대목에 이르자 마오쩌둥은 “원숭이가 사람으로 진화하는 과정을 보면 꼬리가 가장 말썽이다. 대만 문제도 꼬리가 남아 있다. 그래도 이미 원숭이는 아니다. 원인(猿人)까지는 왔다. 꼬리가 길지 않다”며 껄껄댔다.

인도지나에 주둔하는 미군에 관해서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마오쩌둥은 미국이 주장하던 도미노이론이 영 못마땅했다. “미국은 새 사람으로 태어나야 한다. 키신저는 우리보다 영어를 잘한다. 도미노라는 패짝이 무슨 뜻인지 물어봐라. 진보는 별게 아니다. 쥐고 있는 꽃패를 던지면 된다. 우리는 남을 때린 적이 없다. 저들이 우리를 때렸다.” 끝으로 “제갈량에게 배워야 한다”며 미·소 간의 냉전체제를 깨고 미·중·소를 주축으로 한 신3국 시대의 등장을 예고했다.

저우언라이는 동틀 무렵에 마오쩌둥의 숙소를 나왔다. 그의 나이 73세, 골병이 들만도 했다. 키신저는 찐빵과 콩국 한 사발, 저우언라이가 어렵게 구해온 치즈로 아침을 때웠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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