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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 세우고, 돈 오가고, 한해 공모전 300여 개 … “추사도 청탁 없인 떨어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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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올해 대한민국 미술대전 서예부문 심사장면. 낙관을 가린 출품작을 강당 바닥에 깔아놓고 3차에 걸쳐 하루 종일 진행됐다. 심사에 참가해 본 한 서예가는 “출품작이 너무 많다 보니 ‘3초 심사’라고도 한다. 문장을 일일이 읽어보고 오탈자를 검증하기는커녕 일별도 버겁다”고 털어놓았다.


“심사 당일, 운영위원이라는 사람이 ‘꼭 입선시켜야 할 사람들입니다. OO씨는 특선을 해야 합니다’라며 8명의 이름이 적힌 쪽지를 건넸다.” 서예협회 주최 제21회 대한민국 서예대전(2009년)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던 서예가 이종호씨의 고백이다. 이씨는 당시 이 같은 심사비리를 월간 ‘서예문화’에 폭로했다.

올해 대한민국 미술대전 서예부문(미술협회 주최) 대상작, 최우수상작 자격 논란이 일고 있다. 본지는 2006년 입상작 중 10여 점에서 오탈자(誤脫字)가 발견됐음을 보도하기도 했다. (2006년 5월 16일자 3면 참조) ‘시 시(詩)’자를 ‘때 시(時)’자로 쓰는 등 한문 뜻을 모른 채 베껴 쓴 작품이 많았다. 오류를 지적한 지 5년이 지났으나 똑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꽃 화(花)’자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이응노의 서예 작품(75×70㎝).

서예대전의 위상이 추락하고 있다. 일단 허술한 심사가 문제다. “하루 만에 이뤄지는 심사에서 수천 점을 나눠서 봐야 한다. 이러니 ‘3초 심사’라는 얘기도 나온다. 글을 읽기는 둘째 치고 출품작을 한 번씩 보는 것도 큰 일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심사위원이 본지에 털어놓은 말이다.

 그는 “운영위원들이 선정자를 미리 정해두고 심사위원에게 쪽지를 건네는 ‘쪽지심사’, 심사위원의 제자들이 대거 수상하는 ‘인맥심사’ 등 논란이 잦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공모전에서 상을 줄 수 있는 심사위원 서예가에게 제자들이 몰리고, 이들 제자들이 스승의 작품을 사 주는 구조는 한국 서예계의 관행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왕희지(王羲之)가 출품해도, 추사(秋史)가 출품해도 청탁을 안 하면 떨어질 것”이라는 비아냥도 있다.

 전국에 서예 공모전이 300여 개나 난립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다. 주최 측은 참가자 출품비로 수익을 내고, 출품자들은 공모전으로 이름을 얻으려 하는 구조다. 서예계 3대 단체인 미술협회·서예협회·서예가협회가 각각 주최하는 공모전마저 수상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미협 서예부문 임종현 이사는 “공모전 외에는 득명(得名)이 어렵다. 전국 대학에 서예과가 6곳, 국내에 서예인이 수백만 명인데, 서예시장 규모는 매우 적다”고 말했다. 서예는 일반 화랑이나 경매에서 거의 거래가 안돼 작가들이 이름을 알리려면 공모전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는 해명이다.

 일례로 다른 미술 공모전과 달리 서예에는 ‘초대작가’ 제도가 남아 있다. 입선 10번, 특선 5번, 혹은 대상 한 번 수상 등 수상 종류별로 일정 횟수를 채우면 초대작가가 된다. 신춘문예 한 번 입상으로 등단을 인정하는 문학계와도 사뭇 다른 제도다. 많은 서예인이 수상 후에도 이 횟수를 채우기 위해 계속해서 공모전에 출품하게 된다.

 월간 ‘서예문화’ 문종선 발행인은 “정상적 코스로 가면 초대작가가 되는 데 10년 이상 걸린다. 등용문이라는 게 이렇게 오래 걸린다는 것도, 서예가들이 초대작가가 되면 ‘이제 끝’이라고 여기는 것도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서예의 정체성과 관련된 대목도 있다. 오늘날 많은 서예인들이 글의 내용보다 모양에 치중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한학자 김상환씨는 “서예가들이 내용도 모르고 쓰는 경우가 많다. 스승 글씨를 얼마나 잘 따라 하느냐가 관건인 시대”라고 꼬집었다. 김종영미술관 최열 학예실장도 “본래 서예·사군자에서 중시되는 것은 그걸 쓰고 그린 사람이었다. 사람의 생애와 어우러져 명필이 되고 명품이 되는 것인데 요즘에는 글씨만 잘 쓰면 서예가 행세를 한다”며 “그런 작가들이 양산되면서 서예가 창의성을 잃은 묵은 장르로 전락했다”고 비판했다.

 위기의 서단, 해법은 없을까. 전문가들은 크게 세 가지를 든다. 첫째, 난립한 공모전의 정리다.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이동국 수석 큐레이터는 “서예 공모전을 제도·권위·실력 면에서 대표성 있는 주체가 주관하는 통합 타이틀매치로 정리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공모전이 난립하면서 서단이 사분오열되고, 차별성 없는 공모전이 서단을 먹여 살리는 ‘장치’가 됐다는 지적이다.

 둘째, 공모전 규격 문제다. 가로 70㎝에 세로130∼205㎝ 규격의 종이에 글씨를 쓰는 것, 혹은 소자(小字) 부문은 한 글자당 가로세로 2.5㎝ 이내로 글씨를 쓰는 것 등 각 공모전에는 정해진 규격이 있다. 출품자들은 대개 스승이 써 준 본을 놓고 베끼고 있다. 공간에 제한을 두지 않는 공모전으로 조형예술로서의 서예의 격을 한껏 높여야 한다는 제안이다.

 세째, 서예전의 다각화다. 읽지도 못하는 난해한 한자를 나열해 놓은 서예전, 남의 글씨를 베낀 서예전은 대중의 외면을 받는다. 최열 실장은 “서예에서도 회화나 설치미술의 가능성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서예 전시를 다각화하는 게 서예의 살 길”이라고 말했다.

  권근영 기자

올해 대한민국 미술대전 서예부문 (미술협회 주최, 한글부문 포함)

- 총 1569점 응모. 참가비 6만원(2점 출품시 10만원).

- 대한민국 서예대상 1점, 최우수상 2점, 우수상 7점, 특선 144점, 입선 452점 등 수상작 총 606점.

올해 서예대전 한문 부문 심사 어떻게 했나

- 1차 심사: 운영위원회에서 추천한 23명의 심사위원이 합의하에 심사.

- 2차 심사: 서단 밖 인물이거나 계파를 초월한 명망가를 특별 심사위원으로 초빙, 이 한 명이 들어가 떨어진 작품의 20% 정도 구제. 지난해부터 생긴 제도.

- 감수: 2차 심사 통과작에 대해 두 명의 한학자가 문헌 검증

- 3차 심사: 8명의 심사위원이 대상, 최우수상, 우수상 등 수상작 선정.

* 심사는 4월 28일 하루에 모두 진행, 29일 오전 5시에 종료. 특선 이상 후보자 156명에 대해서는 29일 현장에서 휘호 심사. 그 결과 두 명 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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