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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흔들 춤추는 듯한 품새, 주먹 안 쓰고도 상대 제압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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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호 20면

서울 인사동 문화마당에서 열린 택견배틀 경기에서 경북 성주 전수관의 배정석 선수(가운데)가 경기 수원 전수관 이진욱 선수의 후려차기를 피하고 있다. [결련택견협회 제공]

전통 무예 택견이 도약의 날갯짓을 하고 있다. ‘택견배틀’이라는 아마추어 대회가 8년째 열리고 있고 대학 동아리, 지역 전수관을 통해 택견을 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올해는 택견이 전국체전 시범종목으로 선정됐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도 추진하고 있다. K팝이 유럽을 매료시킨 것처럼 세계인이 즐기는 무예로 택견이 자리 잡을 가능성도 있다. ‘이크, 에크’라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품밟기(스텝) 구령으로 시작하는 택견. 공격보다는 방어, 강함보다는 부드러움, 직선보다는 곡선, 개인보다는 공동체를 앞세우는 정신이 택견에는 살아 있다. 쓰러진 상대를 무차별 가격해 피를 봐야만 직성이 풀리는 과격한 격투기의 시대에 ‘평화의 무도’ 택견이 주목받는 이유다.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하는 택견의 세계

매주 토요일 오후 4시 서울 인사동 문화마당에서는 ‘택견배틀’이라는 이름의 결련택견 대회가 열린다. 결련택견협회가 주최하는 이 대회는 2004년 시작해 올해 8회째다. 결련택견이란 두 편으로 갈라 승부하는 택견 경기를 말한다. 관객은 인사동에 들렀다가 사물패의 소리를 듣고 발걸음을 멈춘 젊은이가 대부분이다. 직장인 박경희(28)씨는 “전통이라고 하면 고리타분할 거라고 예상했는데 생각보다 재밌다”며 발을 떼지 못했다. 외국인 관광객도 눈에 띄었다. 신혼여행 중이라는 미국인 마이크(30)는 “젊은이들이 전통문화를 즐기는 것이 신기하고 보기 좋다”며 관심을 보였다. 택견배틀에는 대학 동아리와 지역 전수관 등 16개 팀이 참가해 대결을 펼친다. 선수들은 아마추어지만 패기 넘치는 젊은이들이라 경기는 흥미진진하다.

“택견 하는 것 보면 성격 알 수 있어”
택견은 발로 차거나 발을 걸거나 손발을 이용한 다양한 기술로 상대를 넘어뜨려 승부를 결정짓는 무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택견을 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행해졌을 것으로 보인다. 대한택견연맹 윤종원 전무이사는 “택견은 마을의 우두머리를 뽑기 위해 열렸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내에서 택견을 하는 사람은 전문 선수와 아마추어를 합쳐 150만 명에 달한다. 대한택견연맹 주최로 다섯 개 전국대회가 열리고 있으며 생활체육 대회는 100개 이상 된다.

택견의 가장 큰 특징은 공격보다 수비가 먼저라는 점이다. 택견꾼들은 택견을 ‘지키기 위한 무술’이라고 말한다. 상대를 정복하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힘을 쓴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고수일수록 신체 접촉을 최소화하면서 상대를 제압한다. 택견은 주먹 가격이 금지돼 있어 부상의 위험도 적다. 태권도의 기원을 택견에서 찾는 이도 있지만 택견꾼들은 택견과 태권도는 엄연히 다른 스포츠라 주장한다. 윤 이사는 가장 큰 차이점으로 공격 기술을 꼽았다. 그는 “태권도는 타격에 의해 점수를 얻지만 택견은 한판으로 끝나는 경기다. 태권도의 공격 기술이 직선적이라면 택견은 곡선적인 공격 기술을 중심으로 한다”고 설명했다.

젊은이들이 꼽은 택견의 가장 큰 매력은 창의성이다. 택견은 상대를 넘어뜨리는 기술, 손발이 연결되는 방식이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사람마다 품새와 기술이 제각각이다. 고려대 택견동아리 한울의 김지훈(32) 회장은 “택견은 정해진 품새가 없다. 낱기술을 이용해 자기 몸에 맞춰 품새를 만든다. 키가 큰 사람, 체격이 좋은 사람, 발이 빠른 사람의 품새가 다 다르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택견을 하다 보면 각자의 성격까지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고 한다.

여성들 “호신과 다이어트에도 좋아요”
공동체 의식이 녹아 있는 스포츠라는 점도 젊은이들이 택견에 끌린 이유다. 윤 이사는 “택견은 마을 사람끼리 겨뤘기 때문에 상대를 배려하는 정이 있는 스포츠”라고 설명했다. 숙명여대 택견 동아리 원화 16기 최지아(25)씨도 “승패에 연연하기보다 상대와 어울리고 즐길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친구를 꺾어야만 내가 성공하는 전쟁터 같은 경쟁 사회에 지친 젊은이들에게 택견이 다가간 것이다.

여대생들이 꼽은 택견 사랑의 또 다른 이유는 ‘호신’이다. 성균관대 택견동아리 명륜의 인승희(22)씨는 “택견은 큰 움직임을 요하지는 않지만 강하게 때릴 수 있는 무술이라 호신에 도움이 된다”고 대답했다. 결련이 아닌 시연 택견의 경우 팔과 다리를 사용해 체조 동작을 함으로써 다이어트 효과도 볼 수 있다. 원화 21기 박민선(20)씨는 “택견은 허벅지나 팔뚝의 살을 빼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여성이 배우기에 크게 어렵지 않다는 점도 택견의 매력이다. 한국택견협회 이종화 사범은 “택견은 다른 무술에 비해 부드러운 것이 특징이다. 시연 택견은 여성들이 유연성과 체력을 동시에 기를 수 있는 운동”이라고 설명했다.

택견은 격투기의 특징인 ‘잔인성’이 없어 남녀노소 부담 없이 수련하고 관람할 수 있다. 결련택견협회 도기현 회장은 “무술과 풍물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결련택견이야말로 우리 전통문화 종합상품인 셈”이라고 말했다.

한국 전통무술 택견이 세계적인 스포츠로 발전할 수 있을까. 택견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당연하다”고 말한다. 한국택견협회 정만영 사무총장은 “택견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문화재청은 유네스코에 국내 무형문화재 중 택견을 우선 순위로 제출해 놓았다. 세계문화유산 등재 여부는 11월 프랑스 파리 총회에서 결정된다.

대한택견연맹 이용복 회장에 따르면 올 9월 이란 테헤란에서 10개국이 참가하는 국제택견대회가 열린다. 이 회장은 “택견은 지금까지 세계에 소개된 동양무술과는 차별되는 특징이 있다. 상대방을 안 다치게 하면서 경쟁을 통해 용감성·예의·신체적 능력 등을 향상시킨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런 설명을 들은 사람들은 ‘택견의 정신이야말로 인류가 추구해야 할 가치’라고 입을 모은다. 이 때문에 택견은 저개발국보다는 미국·유럽 등 문화 수준이 높은 국가에서 호응을 얻고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은 멀다. 저마다 ‘적통’이라고 주장하는 택견 단체들이 대승적 통합을 이뤄내야 한다. 국제적인 감각에 맞는 룰과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것도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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