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독재국에 ‘그림자 인터넷’ 심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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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그림자(shadow)’ 인터넷·휴대전화 시스템. 미국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정부가 최근 박차를 가하고 있는 비밀 프로젝트다. 독재정부가 국가 통신망을 차단하더라도 반정부 세력이 인터넷과 휴대전화를 쓸 수 있도록 기술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프로젝트의 골자다.

 30년 장기집권한 호스니 무바라크(Hosni Mubarak) 이집트 대통령을 몰아낸 힘이 인터넷·스마트폰을 통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나온 데서 착안했다. 미 정부는 이 시스템을 이란·시리아·리비아 등 주로 중동지역에서 사용할 계획이지만 북한에도 적용할 것으로 보인다.


 뉴욕 타임스(NYT)는 정부 관계자 인터뷰와 그동안 입수한 문건, 미 국무부 비밀 전문 등을 통해 오바마 행정부가 이 같은 프로젝트를 극비리에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12일(현지시간) 보도했다. 과거에도 미 정부는 독재국가에 외부 세계의 소식을 알리는 작업을 펼쳐왔다.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방송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아랍의 봄’으로 불리는 중동·북아프리카 민주화 시위 이후 인터넷이 더욱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전해들은 외부세계의 사이버 정보를 바탕으로 해당 국가의 내부에서 ‘민주화 레지스탕스’가 자생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로 한 것이다.

 미국 수도 워싱턴의 엘(L)가에 있는 5층 건물엔 밖에서 보기에 허름한 사무실이 숨어 있다. ‘가방 안의 인터넷(Internet in a suitcase)’이란 미 국무부의 비밀 계획을 진행하는 곳이다. 구성원으론 국무부 직원은 물론 통신 기술자와 전직 해커, 심리학자까지 섞여 있다. 팀을 이끌고 있는 외교안보 싱크탱크 신미국재단(NAF)의 사샤 메인래드는 “우리는 정부가 통제·감시하거나 차단할 수 없는 독립된 무선 통신망 구축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NYT에 설명했다.

 이들이 만든 무선 통신장비는 평범한 가방 안에 들어 있다. 가방을 독재국가 안으로 몰래 들여가 설치하기만 하면 가방에 든 노트북 컴퓨터가 작은 무선통신 기지국이 된다. 이 기기와의 통신 프로그램을 설치한 컴퓨터나 스마트폰은 국가 통신망이 차단돼도 동영상이나 e-메일을 주고받을 수 있다.

메인래드가 이끄는 팀 외에도 비슷한 기술을 응용한 10여 개의 무선 통신망 구축 프로젝트가 동시에 진행 중이다. 미 국무부는 올해 말까지 이 같은 프로젝트에 7000만 달러(약 760억원)를 투입할 예정이라고 NYT는 전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선 ‘섀도 휴대전화 시스템’이 실전 활용되기도 했다. 미국과 아프간 정부가 설치한 휴대전화 중계탑이 밤만 되면 탈레반에 의해 무력화됐다. 고심 끝에 미국은 미군 기지 안에 대형 중계탑을 세웠다. 아프간 정부의 국가 통신망이 두절돼도 이 중계탑을 이용해 휴대전화 통신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이 프로젝트에도 5000만~2억5000만 달러의 예산이 투입된 것으로 NYT는 추산했다.

 NYT는 2009년 5월 탈북자 김모씨와의 인터뷰를 통해 중국과 북한 국경지역에서 활용된 ‘아날로그 방식’도 소개했다. 북한 쪽 야산에 은밀히 묻어놓은 중국 휴대전화를 북한 내 활동가가 밤에 파내 중국 쪽 파트너와 비밀 통화를 했다는 것이다. 북·중 국경지역에선 중국 휴대전화가 터진다는 점을 이용했다.

뉴욕=정경민 특파원

◆그림자(shadow) 인터넷 프로젝트=특정 국가에 여러 대의 소규모 무선통신장비를 설치해 독재 정부가 국가 통신망을 차단해도 반정부 세력이 인터넷과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미국 국무부의 프로젝트.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이집트에서 무바라크 독재정권을 몰아내는 데 큰 힘이 된 것에 착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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