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3. 끝없는 편력 <160>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7면

옛 공원 빈터 주변으로는 전쟁 때 파괴된 골조와 벽들에 기대어 바라크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식당이나 주점들이 비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틀어박혀 있었다. 우리는 골목의 맨 안쪽에 있던, 학생들이 드나드는 싸구려 막걸리 집에 들어가 구석자리에 앉았다. 그때에 무슨 얘기로 말문을 열었는지 자세한 기억은 없다.

그녀의 이름은 순이라고 하자. 그 애의 아버지는 밑천 없는 작은 장사꾼으로 평생을 보냈는데 가족끼리의 사랑은 돈독했다. 순이는 오빠 하나가 유일한 형제였는데 오누이가 둘 다 총명해서 명문 고교를 나왔다. 순이는 집에 그럴 만한 돈도 없었지만 스스로 대학 가기를 포기했다. 시를 쓰다 말다 했다. 아마 첫 번째 얘기는 아니었을 테고 몇 번 만나고 나서였을 것이다. 그녀가 가출했던 얘기가 나왔다. 그녀는 동네 철공소에 나오던 선반공 소년을 꾀어서 북한강변의 외진 골짜기까지 달아났다. 정사를 할 동반자가 필요했다든가. 순이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알퐁스 도데의 '별'이나 황순원의 '소나기'와는 달리 삭막하고 황폐한 젊음에 대하여 짧게 줄여서 말했다. 초등학교 때의 폭행의 흔적이며 그를 사춘기 내내 사로잡았던 가난한 대학생에 대해서 몇 마디 하면서 그녀는 덧붙였다.

-여름방학 같은 때, 장마지고 비 그치면 아침인지 저녁인지 잘 분간이 안 되는 그런 날이 있잖아. 누군가 놀려 주려구 얘, 너 학교 안 가니? 그러면 정신없이 책가방 들고 나갔다가 깨닫고 되돌아 오잖아. 내게는 요즈음이 매일 그런 날 같다. 감기약 먹고 자다 깨다 하는 그런 나날.

강변 모래밭에서 밤에는 추워서 선반공 소년과 꼭 끌어안고 자고 배 고프면 인근 밭에 가서 옥수수 따다 구워먹고, 햇고구마 캐어다 날로 먹고. 소년이 어찌나 든든하게 보살펴 주고 어찌나 순박한지 함께 죽자고는 못하겠더라고. 그래서 그냥 시시하게 돌아오고 말았다지. 초등학생 몇 명 모아서 과외지도하는 일로 용돈을 벌면서 그녀는 혼자 틀어박혀 책만 읽고 있었다. 순이도 어떻게 알았는지 '공중전'으로 말하는 법을 사용했다.

-해를 떠오르게 만드는 사람이 곁에 없을까.

그건 마르셀 카뮈 감독이 브라질 리우 축제를 배경으로 하여 만든 영화 '검은 올페'얘기를 하는 것 같다. 흑인 소녀가 흰둥이 깡패들에 의해 강간당하고 죽은 뒤에 올페가 텅 빈 관청 복도를 찾아 헤매는 장면이 떠오른다. 복도에 바람이 휘몰아치면서 호적이며 주민등록 대장 등속의 서류들이 복도 가득히 날아다닌다. 그곳이 지옥인 셈이다. 그가 빈민가의 언덕 위에 기타를 들고 나타나면 맨발의 아이들이 몰려와 그에게 해를 떠오르게 해달라고 조른다. 기타를 뜯기 시작하면 해가 태평양 저편에서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나는 그녀와 몇 번 함께 잘 기회도 있었지만 오히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자주 만나지도 못했다. 내가 다른 데 빠져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대위와 함께 남도로 떠나기 전에 그녀와 밤을 함께 보냈고 서로 이번에는…하며 노력해 보았지만 싱겁게도 성사되지 못했다.

그림=민정기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