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석 사장 전격 경질 이건희 회장 분노 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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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위기는 작은 부패에서 나온다. 부패가 한번 스며들기 시작하면 아무리 작더라도 큰 화를 입기 십상이다. 그래서 작을 때 도려내야 한다. 8일 이건희(69) 삼성전자 회장이 내린 조치가 그랬다. 이날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사옥에서 열린 수요 사장단 회의. 김순택 미래전략실장은 크게 화가 난 이 회장의 질타 발언을 전했다.

“삼성의 자랑이던 깨끗한 조직문화가 훼손됐다. 삼성 내 부정부패를 뿌리뽑아야 한다.”

이는 최근 실시된 삼성테크윈 경영진단 결과와 관련한 질책이었다. 이 회장은 “각 계열사에 대한 감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 아니냐. 대책도 미흡하다”며 “해외에서 잘나가던 회사들도 조직의 나태와 부정으로 주저앉은 사례가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어 “삼성도 예외가 아니다. 감사를 아무리 잘해도 제대로 처벌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덧붙였다.

 이 회장 발언 즉시 오창석(61) 삼성테크윈 사장이 최고경영자(CEO)로서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했다. 그룹 관계자는 “오 사장 개인 비리는 없다. 부하 임직원이 관련된 사안이다. 오 사장은 해당사의 대표이사로서 본인이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라고 말했다.

김순택 미래전략실장

 삼성테크윈은 올 3월부터 2개월간 미래전략실 경영진단팀으로부터 강도 높은 경영진단을 받았다. 경영진단은 감사를 포함해 기업 경영 전반에 대해 점검한다. 이인용 커뮤니케이션팀장은 “감사 내용을 일일이 말할 수는 없다”며 “사람 사는 세상에서 있을 수 있는 정도의 일이지만 그간 삼성이 자랑해 온 깨끗한 조직문화가 많이 훼손됐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 회장 생각으로, 비록 사회적 통념에 비춰볼 때 그리 크지 않다 해도 이런 일이 삼성 안에서 일어났다는 것이 문제”라고 덧붙였다.

 이 같은 배경 설명에서 유추해 볼 때 삼성테크윈에서 적발된 임직원 비리는 엄청난 사안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삼성도 일각에서 제기한 ‘K-9 자주포’ 납품 비리와는 관련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일부 직원이 법인카드를 개인적 용도로 썼다가 적발됐다는 얘기가 들린다. 방산업계의 고위 관계자는 “삼성테크윈과 외부 방산업체가 얽힌 비리는 아니라고 들었다”면서 “경영진단 감사에서 내부적으로 회사 자금을 유용한 건이 적발됐다고 들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회장이 사회 통념을 뛰어넘는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것은 삼성 창업자인 고 이병철 회장의 경영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병철 회장은 “일을 잘하려고 하다가 저지른 실수는 너그럽게 용서하겠지만, 사욕을 위해 부정을 하거나 거짓 보고를 하거나 불성실한 자세로 업무에 임하는 것은 용인하지 않는다. 이를 용인하는 것은 자신은 물론 기업이나 국가에 다 같이 누를 끼치는 것”이라고 늘 강조했다.

 이건희 회장은 올 4월 말부터 거의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서초동 사옥으로 출근하면서 계열사 경영진단을 꼼꼼히 챙겼다. 비서실이 해체된 이후 임직원의 윤리의식이 해이해진 것으로 보고 이참에 ‘일벌백계’ 차원에서 삼성테크윈을 선택했다는 해석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특히 애플을 비롯한 삼성의 글로벌 경쟁 상대들을 눈앞에 두고 그룹의 초심을 다잡기 위한 시범 케이스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는 전망도 나온다. 그룹 고위 관계자는 “삼성테크윈 말고 다른 계열사에서도 비리가 적발되고 있다”며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취지에서 예외 없는 조치가 내려질 것”이라고 말했다. 몇몇 고위 경영진 비리 여부에 대해서도 감사를 벌인 것으로 전해진다.

 한편 물러난 오창석 삼성테크윈 사장은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1974년 제일제당에 입사해 삼성중공업을 거쳐 92년 삼성테크윈으로 자리를 옮겼다. 부사장에 오를 때까지 삼성테크윈에서만 16년을 근무해 누구보다 내부 사정에 밝다. 사거리 40㎞급 곡사포인 K-9자주포 ‘썬더’의 개발과 수출에 성공했고, 그 공로로 2008년 삼성테크윈 최초로 내부 승진을 통해 사장까지 올랐지만 조직관리에 책임을 지고 사표를 내야 했다.

심재우 기자

◆삼성테크윈=1977년 미사일 추진기관을 생산하는 방위산업체로 설립됐다. 처음 삼성정밀로 시작한 사명은 삼성항공산업으로, 다시 삼성테크윈으로 바뀌었다. 80년대 항공기 엔진 국산화에 성공했고, 97년에는 국내 최초로 디지털카메라를 만들었다. 카메라 사업은 지난해 삼성전자로 이관했고, 현재 주력은 K-9자주포 생산 등 방위사업이다.

김순택 실장이 전한 이건희 회장 발언

▶ 삼성의 자랑이던 깨끗한 조직문화 훼손됐다. (부정을) 뿌리뽑아야 한다.
▶ 계열사에 대한 감사 제대로 못한 것 아니냐, 앞으로의 대책도 미흡하다.
▶ 해외 잘나가던 회사들도 조직의 나태와 부정으로 주저앉은 사례 적지 않다. 삼성도 예외 아니다.
▶ 감사 아무리 잘해도 제대로 처벌 않으면 안 된다. 전 그룹 구성원들에게 부정 저지르면 큰일난다는 생각 심어줘야 된다.
▶ 감사 책임자 직급(현재 전무 또는 상무) 높이고, 인력 늘리고, 자질 높여야 한다. 회사 내부에서 완전히 별도의 조직으로 운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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