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영아의 여론女論

의사의 자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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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이영아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연구원

한국의 근대소설에 나타난 의사의 부정적인 모습은 이기주의, 상업주의, 귀족주의 같은 것들이었다(조남현, ‘한국소설에 비친 의사의 모습’, 『한국 현대작가의 시야』, 문학수첩, 2005). 즉 의사가 치료비 없는 환자를 내쫓는다거나, 출세를 위해 권모술수를 쓰거나, 치료행위를 불성실하게 하는 등과 같은 모습은 소설에서 빈번히 다루어져 왔다. 하지만 의사가 진료 중에 환자를 성추행한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소설화된 적이 없었다.

 나도향의 ‘J의사의 고백’(『조선문단』)이 그나마 의사의 환자와의 성적 방종에 대한 내용을 다룬 경우다. J는 그동안 “나이가 어린 데다가 남에게서 별로 볼 수 없는 자격 즉 의사 면허장을 가진 것” 때문에 자신을 따르는 여성들과 방탕한 연애를 해왔다. 그러나 이것은 진료실 밖, 사적 영역에서의 일이었다. 즉 공적 영역에서 의사 J는 “사람의 머리를 보면 피부와 근육과 또는 그 속에 잠겨 있는 뇌밖에는 보이지 않았으며” 사람을 뼈, 살, 근육, 호르몬 등으로 이루어진 “한 개의 기계”로 여길 뿐이었다. S와의 관계에서도 J는 공사(公私) 구분은 분명히 했다. 그래서 S를 처음 만난 것은 환자 대 의사로서였지만 이들이 연애를 시작한 것은 어느 카페에서였다.

 그만큼 의사가 환자의 몸을 성적(性的) 시선으로 보거나 만진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싫은 일이었다. 근대 의학의 시스템을 받아들인 지 얼마 안 된 한국인들에게 그런 상상은 일종의 ‘금기’였다. 그것이 절대 일어날 리 없는 일이라고 여기지 않고서는, 의원에게 진맥 받는 일도 수치스러워하던 한국 여성들이 감히 병원을 찾아가 남성 의사 앞에서 몸을 보여줄 용기를 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의대생의 집단 성추행 사건에 사람들이 크게 분노하고, 출교까지 요구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장차 의사가 될 사람들이었다는 데 있다. 의사 앞에서 환자인 우리들은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의사를 믿고 그들에게 우리의 몸을 송두리째 맡겨야만 의사-환자 간 관계가 온전히 성립한다. 이때 우리의 ‘믿음’에는 의사의 지식과 기술에 대한 믿음뿐 아니라, ‘의사는 인간의 육체에 대해 그 누구보다 공사(公私)구분을 잘 할 것’이라는 믿음도 포함되어 있다. 의사가 나의 몸을 성적 대상화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없으면 여성 환자들이 남성 의사에게 진료받는 일은 불가능하다. 의대생 집단 성추행 사건은 우리의 그러한 믿음을 흔들어 놓았다. 그들이 저지른 범행의 면면이 진료대나 수술대 위에 누워 있는 우리에게 닥칠 수 있는 일처럼 상상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더욱 극심한 혐오감과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영아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