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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분도, 포기도 해선 안 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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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문길주
KIST 원장

미국의 생물학자 레이첼 카슨이 쓴 『침묵의 봄』은 어느 화창한 봄날 아침 눈을 떴는데 새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적막한 장면으로 시작한다. 새들이 살충제·제초제 등 각종 화학물질에 오염돼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환경에 노출된 화학물질이 동식물의 생태계와 인간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경고다.

 경북 칠곡의 미군 기지에 고엽제가 매립되었던 사실이 알려지면서 의혹이 확산되고 있다. 미군 부대가 주둔했던 다른 지역으로 불안이 퍼지고 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고엽제가 우리 땅 곳곳에 묻혀 있을지 몰라 꺼림칙해하고 있다. 침묵의 봄이 우리의 얘기가 되고 있다. 환경과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칠곡에 매장된 것으로 알려진 ‘에이전트 오렌지’는 제초제의 일종이다. 사실 우리나라 근대화 과정에서 많은 산업 폐기물들이 발생했지만, 이를 제대로 처리했다는 기록은 없다. 기록이 없다는 건 처리를 제대로 안 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그 많은 오염물질들이 이 땅 곳곳에 묻혀 있다는 얘기다. 수십 년이 지나 이제는 어디에 어떻게 묻혔는지 알 수 없다. 그러다 어떤 계기로 그 일부가 드러날 때마다 새삼 사회 이슈로 부각되고 있다.

 늦었지만 제대로 대처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섣불리 복원을 시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정화과정에서 또 다른 형태의 수질, 토양, 또는 대기오염을 유발해 A형태의 오염을 B형태로, B형태의 오염을 C형태로 바꾸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먼저 정부를 중심으로 철저한 오염상태 조사가 이뤄져야 한다. 그 조사결과를 토대로 토양복원기술(remediation)을 활용해 생태계를 되살려야 한다. 땅에 스며든 오염물의 처리가 결코 간단치 않은 문제이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는 엄청난 투자가 필요하다.

 차분한 대처가 필요한 또 다른 이유는 감정적인 대응이 불러올 또 다른 ‘은폐’를 막기 위해서다. 상대가 미군이든 기업이든 무조건 돌을 던지기 시작하면 그들은 더 이상의 내용을 밝히지 않고 숨기기에 급급할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침묵하고 있는 많은 매립자들이 더 늦기 전에 그들의 잘못을 시인하고 오염원으로 인한 환경오염 문제를 함께 풀어갈 수 있도록 사회 전체가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현재 우리 앞에 드러난 문제들은 말 그대로 빙산의 일각일 확률이 높다.

차분한 대응 속에서도 우리가 견지해야 할 것은 끈기다. 언론에 등장하는 일시적인 이슈나 특정 지역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오염된 땅이 바로 우리 집 앞마당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사회 전체가 관심을 갖고 끝까지 해결해 나가야 한다. 오염물질을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공간에 묻어버린 경우도 무수히 많을 것이다. 자연의 자정능력을 넘어선 화학물질은 매립 이후 30, 40년이 지난 지금부터 서서히 독성을 드러낼 가능성이 크다.

 이제부터라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오염물 매립 가능성이 있는 곳에 대해 정부 차원에서 꼼꼼히 조사를 시작해야 한다. 회복까지는 힘들고 어려운 과정이겠지만, 더 이상 피할 수 없다. 그 과정에서 얻는 것도 많을 것이다. 환경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되고 환경을 지키는 데 필요한 기술이 축적될 것이다. 이 같은 값 비싼 경험과 교훈은 이후 안전한 사회를 구축해 나가는 기초가 될 것이다.

 환경 문제는 너무나 중요하고 심각하다.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이제부터 하나씩, 차분하고도 냉철하게, 인내심을 갖고 풀어가야 한다. 우리가 이 문제에 결코 흥분해서도, 포기해서도 안 되는 까닭은 그것이 바로 우리가 숨 쉬고 있고,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할 이 땅의 아픔이기 때문이다.

문길주 KIST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