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욱의 과학 산책] 남성이 피임약을 먹는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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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조현욱
객원 과학전문기자
코메디닷컴 콘텐츠본부장

올해는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여성용 먹는 피임약의 판매를 승인한 지 51년이 되는 해다. 하지만 남성용 피임약은 아직도 연구 단계에 머무르고 있다. 만들기가 더 까다롭기 때문이다. 여성용은 여체를 속이는 호르몬제로 족하다. 이를 복용하면 몸이 임신 중인 것으로 착각해 배란을 중단한다. 그 탓에 메스꺼움을 느끼거나 얼굴이 붓는 등의 부작용이 가끔 나타나지만 말이다. 하지만 남성은 임신 같은 것 없이 사시사철 정자를 생산하는 구조다. 물론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을 억제하는 주사를 놓아서 정자 생산을 중단시키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심혈관 질환의 위험을 키우고 성욕도 줄게 만든다는 부작용이 문제다.

현재 유망한 접근법 중의 하나는 정자가 칼슘을 제대로 이용할 수 없도록 방해하는 것이다. 그러면 난자를 뚫고 들어가 수정시킬 힘을 잃게 된다. 지난해 5월 이스라엘 발란 대학 연구팀이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이 같은 먹는 피임약이 이르면 5년 내로 개발될 것이라고 한다. 다른 하나는 고환의 비타민A 흡수를 억제하는 것이다. 비타민A가 없으면 정자가 생산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거의 1세기 전부터 알려져 있다. 문제는 비타민A가 눈에서 빛을 감지하는 수용체에 꼭 필요한 영양소라는 점이다.

이 문제를 해결할 획기적인 돌파구가 최근 열렸다. ‘내분비학(Endocrinology)’ 저널 6월호에 실린 논문이 이를 소개했다. 원리는 간단하다. 비타민A는 체내 대사과정에서 레티노이드란 물질로 바뀌는데 고환과 눈은 이것을 흡수하는 통로가 다르다. 이 중 고환 쪽의 흡수통로만 차단하는 합성물질을 투여하는 것이다. 연구팀은 수컷 생쥐를 대상으로 체중 1㎏당 1㎎을 4주간 먹인 결과 불임이 되는 것을 확인했다. 약을 끊으면 곧바로 생식능력이 회복됐으며 다른 부작용은 나타나지 않았다. 장기간 투여해도 안전성이 유지되는가를 확인하는 것이 다음 연구과제다.

재미있는 것은 이 물질의 발견과정이다. 원래 이 물질은 브리스톨마이어스사가 피부병 및 감염성 질환 치료제로 개발하던 것이었다. 하지만 불임을 유발한다는 치명적 부작용이 발견되자 관심을 끊었다. 해당 개발팀은 ‘독성학(Toxicological sciences)’ 저널 2001년 2월호에 “~는 고환의 독”이라는 제목으로 그 부작용을 발표했다. 우연히 이 논문을 접한 뒤 실험을 확대해 개가를 올린 것이 이번의 연구결과다. 나중에 이 물질이 남성용 경구피임약으로 특허를 받게 되면 브리스톨마이어스사는 땅을 치며 후회하지 않을까.

조현욱 객원 과학전문기자·코메디닷컴 콘텐츠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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