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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속도 늦추는 순간, 인생은 짧아도 시간은 길어진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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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 타임’이라는 표현은 요즘 듣기 힘들다. 우리의 시간 관념을 꼬집던 이 말의 뜻을 잘 모르는 젊은이도 많다. 시간에 대한 여유 있는 태도를 의미하는 ‘아프리칸 타임’이라는 말이 아프리카에서 아직 쓰이고 있다고 한다. 코리안·아프리칸 타임이 왠지 정겹게 들리는 이유는 뭘까. ‘빨리빨리’의 압박 때문이 아닐까.

미국 인류학자 마셜 샐린스는 수렵채집민들의 사회도 ‘풍요로운 사회(affluent society)’였다고 주장했다. 현대인들에 비해 일도 그리 많이 하지 않았던 그들이 나름대로 넉넉하게 살았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이 맞는다면 인류가 물질적으로 잘살게 된 것은 20세기 들어서가 아니다. 물질적 풍요와 시간 부족, 수면 부족을 맞바꿨다고 생각하고 싶은 현대인들에게 억울함을 안기는 주장이다.

현대 산업사회의 부산물 중 하나는 ‘속도 숭배’다. 너 나 할 것 없이 시간이 부족하다. 시간 부족은 참을성 실종을 낳는다. 시간을 아끼고자 여러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하기 때문에 주의 산만도 초래한다. 생각할 틈이 없기 때문에 획일성이 지배한다. 효율성·효과가 입증된 방법을 따라 하기 때문이다. 시간 부족은 면역체계를 약화시키기도 한다. 특별히 돈·명예·권력을 추구해서가 아니다. 하루하루 쫓기듯 살다 보면 그렇게 된다.

‘빨리빨리’를 몰아내고 그 자리에서 ‘안단테 안단테’를 부를 수는 없을까. 그 가능성을 여는 운동이 1986년 이탈리아에서 시작됐다. 슬로푸드(Slow Food) 운동이다. 슬로푸드는 패스트푸드(fast food)의 반대말이다. 당시 로마에 있는 스페인 계단 인근에 맥도날드 햄버거 가게가 들어서려고 했다. 스페인 계단은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헵번이 아이스크림을 먹던 곳이다. 패스트푸드점이 들어설 수 없다는 반대 운동의 선봉에 선 것은 카를로 페트리니였다. 그는 일간지에 요리 관련 기사를 기고하는 인물이었다. 슬로푸드 운동에 대한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페트리니를 비롯한 반대 운동가들도 전혀 예상 못했다. 슬로푸드 운동은 89년부터 세계로 확산돼 현재 세계 132개국에 10만 회원을 거느린 운동으로 성장했다.

슬로푸드는 모든 슬로운동의 모태가 됐다. 느리게 살자는 운동은 인간 활동의 다른 영역으로 급속히 확대된 것이다. 슬로교육, 슬로경영, 슬로리더십 등 슬로운동의 우산 속으로 들어올 수 있는 영역은 무수히 많았다. 아예 인간의 삶 자체가 ‘슬로리빙(living)’, ‘슬로라이프(life)’라는 개념을 통해 슬로운동의 한 축을 이루게 됐다.

우리가 주목할 만한 슬로운동 중에는 슬로양육(slow parenting)이 있다. 칼 오너리에 따르면 부모들이 잘못된 지식을 바탕으로 자녀들을 숨막히게 하고 있다. 예컨대 모차르트 효과라는 것은 없다. 자녀들에게 외국어 회화 CD를 아무리 들려줘도 별 효과가 없다. 사람과 직접 소통해야 아이들이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이다. 이중 언어자가 되려면 깨어 있는 시간의 30%를 목표 외국어에 할애해야 한다. 그래서 오너리는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유년기를 나름대로 즐기게 내버려둬야 한다고 주장한다.

슬로라이프나 슬로운동에서 슬로는 무엇을 의미할까. 슬로운동의 대부인 페트리니의 말을 들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시간 감각을 상실했다. 우리는 뭔가를 빨리 함으로써 삶에 의미를 추가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인생이 짧기 때문에 모든 일에 시간을 내기 위해서는 서둘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인생은 길다. 문제는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현명하게 쓸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시간을 현명하게 쓴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슬로라이프 방식으로 산다는 것은 거북이·달팽이처럼 느리게 산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떤 일을 최대한 빨리 하거나 느리게 하는 게 아니라, 그 일을 하는 데 필요한 최적(最適) 속도를 찾겠다는 것이다.

최적 속도에 따라 삶을 살면 무엇이 달라질까. 자신이 순간순간 하고 있는 경험을 음미(吟味)할 수 있다. 군중 속의 고독에서 벗어나 대인 관계에서는 친밀감을 회복할 수 있다. 슬로패션·슬로디자인·슬로건축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양보다는 질, 소수보다는 다수를 위한 작품·제품·용역을 만들 수 있다. 이들이 하는 질문은 “잘 팔릴까?”가 아니라 “사람들의 웰빙을 증진시킬 수 있을까?”다.

슬로라이프를 비롯한 슬로운동은 개인의 삶 차원에서 머물 수도 있다. 그런 경우 개인은 ‘슬로 철학’에서 삶의 요령이나 마음가짐을 배울 수 있다. 슬로라이프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천천히 일하면 오히려 시간이 남아 여유롭다고 주장한다. 여유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창의력을 발휘할 가능성이 더 넓게 열린다는 이야기다. 생산성 향상이나 창의력 제고에 도움이 되는 슬로라이프는 시장 경제와도 잘 부합된다.

슬로라이프에 매료된 사람들은 고대 그리스 철학이 추구한 ‘좋은 삶(good life)’의 이상적인 형태를 찾았다고 믿는다. 슬로라이프는 강한 영성(靈性)을 띠기도 한다. 사실 슬로라이프는 불교를 비롯한 동양 종교로부터 영감을 받고 있다.

슬로라이프는 공동체와 환경, 전 지구적 차원의 웰빙을 고민한다. 슬로라이프는 개인 차원을 넘어 국제적인 사회운동이 되기도 한다. 시장경제에 대한 거대한 의문을 제기하게 되기도 한다. 21세기 글로벌 경제체제의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에 대해 회의를 품을 수도 있다. 회의가 심화되면 슬로라이프는 시장경제와 갈등·긴장 관계에 놓인다.

유럽의 슬로라이프는 좌파 성향이 강하다. 슬로푸드의 창시자인 페트리니는 공산주의나 중도좌파 일간지에 기고를 해왔다. 시사주간지 타임은 그를 ‘느린 혁명가(slow revolutionary)’라고 부르기도 했다. 슬로푸드에는 이탈리아의 ‘무정부주의적 노동조합주의(anarcho-syndicalism)’ 전통이 묻어 있다는 분석도 있다.

이런 사실은 슬로라이프에서 여가를 선용하는 방법 정도만을 기대했던 지친 도시인들에게 잔잔한 ‘충격’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슬로운동은 시장경제와 잘 지내는 모습도 보여준다. 슬로푸드만 해도 출판사·요리학대학·호텔을 경영한다. 식품·농업 분야 대기업과 이탈리아 정부의 후원금을 받으며 활동하고 있다. 일각에서 슬로운동의 상업화를 비판할 정도다. 슬로운동에 편승해 슬로 제품을 내놓는 발 빠른 회사들도 많다.

슬로운동이 녹색주의나 페미니즘에 버금가는 운동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고 점치는 사람들도 있다. 아직은 모른다. 슬로운동은 역사가 지극히 짧은 젊은 운동이다.
매년 6월 19일은 ‘세계 산보의 날(World Sauntering Day)’이다. 이번에 한번 참가해 보자. 참가하려면 편안한 옷을 입고 서둘지 않고 어슬렁어슬렁 걸으면 된다.

김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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