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슨,마오, 신뢰의 결실고이즈미김정일, 보안의 성공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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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호 08면

2002년 9월 평양에서 열린 북일 정상회담은 1년여 동안 30여 차례 비밀접촉을 하며 신뢰관계를 쌓아 간 밀사외교의 결과물이었다. [평양 AP=연합뉴스]

지난달 중순 북한 문제 전문가들의 모임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한 사람이 말을 꺼냈다. “김천식 통일부 정책실장이 며칠 동안 휴가를 내고 출국했다는데 아무래도 뭔가 있는 것 같지 않아?” 좌중의 의견은 금세 모아졌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내년 서울 핵안보정상회의에 초청한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베를린 발언 직후이니 아마 남북 정상회담과 관련한 물밑협상을 하러 갔을 것”이란 분석이었다. 그로부터 보름여 만인 1일, 북한 국방위원회가 남북 베이징(北京) 비밀접촉을 폭로해 전문가들의 분석은 사실로 드러났다.

극비 추진 정상회담의 성공 조건

이처럼 ‘김 실장의 부재’는 북한 문제 관련자들이나 언론에 주목의 대상이다. 남북 간의 창구가 대부분 막혀 버린 현 정부 내에서 거의 유일하게 접촉의 끈을 유지하고 있는 당국자이기 때문이다. 김 실장은 2009년 11월에도 두 차례 개성에서 북한 당국자와 비밀접촉을 했었다. 사람들의 눈이 뜸한 토요일 이른 시각을 이용해 군사분계선을 넘었지만 보안은 며칠도 유지하지 못했다. 접촉 상대방이 원동연 통일전선부 부부장이라는 사실까지 밝혀졌다. 이 접촉은 2009년 10월 싱가포르에서 남북 정상회담 개최를 협상한 임태희 당시 노동부 장관과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의 만남에 이은 후속협의였다. 이 만남 역시 평양으로 돌아가는 귀로에 베이징에 들른 김 부장이 공항에서 모 국회의원과 조우하면서 보안이 깨지고 말았다. 김 부장을 만난 당국자의 이름과 목적 등이 밝혀지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처럼 드러난 사례들로만 봐도 이명박 정부가 줄곧 남북 정상회담 가능성을 타진해 왔다는 점은 명백하다. 강경한 대북 압박만으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니 정상회담을 추진하는 것 또한 정부로선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번번이 초기 단계에서 보안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기본 원칙을 깨고 비밀협상에 나선 당국자의 실명까지 공개한 북한에 근본적인 책임이 있지만 상황을 통제하지 못한 우리 정부도 비판을 비켜날 수 없다.

외교사를 들춰 보면 중요한 고비마다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정상회담의 사례가 적지 않다. 그 막후에는 회담 성사를 위해 움직인 밀사들이 있었다.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71년 7월 9일 월맹 대표와의 종전협상을 위해 파리로 가던 중 파키스탄을 방문한 헨리 키신저 백악관 안보보좌관이 갑자기 사라졌다. 수도에서 80㎞ 떨어진 휴양지에서 이틀간 요양할 것이란 공식 발표와 언론 보도가 뒤따랐다. 키신저가 다시 모습을 보인 것은 이틀 뒤인 11일. 그는 미뤄 둔 일정을 소화하고 파리로 향했다.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던 키신저 잠적의 진상이 밝혀진 건 닷새 뒤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의 특별성명 발표에 의해서였다. 언론들은 그제야 키신저가 비밀리에 베이징에 가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 총리를 만나 닉슨의 중국 방문에 합의한 사실을 알게 됐다. 죽의 장막을 열어젖힌 닉슨-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 회담은 007 첩보영화를 방불케 하는 밀사외교가 빚어낸 작품이었다.

2001년 9월 일본 외무성의 아시아대양주 국장에 취임한 다나카 히토시(田中均) 외무성 아시아대양주 국장은 주말마다 해외로 출국했다가 월요일 아침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출근하는 생활을 근 1년 동안 반복했다. 그의 ‘주말 행각’의 실체가 드러난 건 이듬해 9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의 평양 방문 계획이 발표되고 나서였다. 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30여 차례 해외에서 북한 밀사를 만나면서도 외무성 간부는 물론 동맹국인 미국에까지 비밀을 유지한 것이다. 북한 밀사의 신원은 아직도 베일에 싸여 있고 일본 언론들은 편의상 ‘미스터 X’라고만 쓰고 있다.

기밀 유지가 완벽했던 사례 중에는 2000년 6월의 첫 남북 정상회담도 있다. 그해 3월 휴가 여행 차림의 중년 남성이 공항 출국심사대에 섰다. 심사관이 신분을 알아보자 그는 특별히 당부했다. “개인적으로 휴가 가는 것이니 상부에 보고는 하지 마세요.” 사실은 정상회담 준비였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보니 그의 책상 위에는 ‘박지원 문화부 장관 휴가차 출국’이란 정보 보고 서류가 올라와 있었다. 그가 의도했건 아니건 박 장관은 진짜 휴가를 다녀온 것으로 소문이 퍼졌다. 상하이(上海)에서 북한 당국자를 만나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 방문에 합의한 사실은 공식 발표 때까지 기밀이 유지됐다.

적대국 또는 국교가 없는 나라들 사이의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밀사외교에서는 공통점이 발견된다. 최고 의사결정권자의 신임이 두터운 밀사들끼리 치밀한 사전 조율을 거쳤다는 점과, 마지막 발표 순간까지 철저하게 비밀이 지켜졌다는 점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조건을 붙인다면 그것은 ‘진정성’이다.

키신저의 조율에 이어 72년 2월 베이징을 방문한 닉슨은 마오 주석, 저우 총리와 닷새 동안 20여 시간 대화를 나눴지만 베트남전 종전과 대만 주둔 미군 철수 등에 관한 견해차를 좁히지 못하고 회담은 겉돌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저우 총리가 키신저의 숙소를 몰래 찾아갔다. 그는 “지금 중국 지도부에선 나만 한 온건파가 없다. 내가 죽고 나면 양국 관계 개선은 어렵다” 며 측근들에게조차 숨겨 왔던 암 투병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의 고백은 닉슨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 결과는 훗날 역사가 입증하는 대로다. 닉슨은 회고록에서 “저우 총리의 냉철하고 진지한 자세와 교섭력에 매료됐고 마침내는 존경하게 됐다”고 술회했다.

북한 국방위원회의 폭로로 물밑에서 진행되던 남북 정상회담은 파탄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김용현 동국대 교수는 “비밀협상 과정을 돌이켜보면 정상회담 성공을 위한 요건이랄 수 있는 남북 양측의 진정성과 치밀함, 밀행성(密行性) 모두에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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