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영아의 여론女論

1930년대판 하우스 푸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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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이영아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연구원

“요사이 걸핏하면 여자가 새로 맞이한 사나이를 보고서 우리도 문화주택에서 재미있게 잘 살아보았으면 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쥐뿔도 없는 조선 사람들이 시외나 기타 터 좋은 데에다가 은행의 대부로 소위 문화주택을 새장같이 가뜬하게 짓고서 스위트홈을 삼게 된다. 그러나 지은 지도 몇 달 못 되어 은행에 문 돈은 문 돈대로 날아가 버리고 외국인의 수중으로 그 집이 넘어가고 마는 수도 있다. 이리하여 문화주택에 사는 조선 사람은 하루살이 뻔으로 그 그림자가 사라진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문화주택(文化住宅)이 문화주택(蚊禍住宅)이다.”

 한국 최초 만문만화(漫文漫畵)의 작가인 안석영(安夕影·1901~50)이 1930년 4월 14일 『조선일보』에 실은 ‘일일일화(一日一畵):문화주택(文化住宅)? 문화주택(蚊禍住宅:모기가 화를 입는 주택)?’이라는 제목의 만문만화다. ‘문화주택’은 1920년대 초 일본이 서양식 주택(洋風住宅)을 모델로 삼아 주택개량운동을 하면서 처음 등장했다. 이것이 다시 조선에 생활개선운동 및 주택개량운동과 함께 유입되었다(이경아, “일제강점기 문화주택 개념의 수용과 전개”, 서울대 박사 논문, 2006). 문화주택은 재래 조선가옥의 비효율성, 좌식 생활양식, 비위생성 등을 개선한 신식 양옥집을 일컫는 말로, 보통 상류층만이 거주할 수 있는 고가(高價)의 집이었다. 이런 집에 피아노와 유성기 등을 구비해 놓고 문화생활을 즐기는 것이 상류층 ‘스위트 홈’의 상징적 이미지였다.

 한국인의 좋은 집 소유에 대한 집착증은 이 같은 상류층의 고급 주거문화가 지녔던 사회문화적 권력에의 동경 때문이었다. 문화주택을 미끼로 사기를 치는 사람들도 등장하고, 집 문제로 다투다 파혼하는 커플이 있을 만큼 1930년대의 문화주택에 대한 열풍은 뜨거웠다. 안석영이 ‘여성선전시대가 되면(2)’(『조선일보』, 1930.1.12)에서 풍자하였듯, 자신의 미끈한 각선미를 남성들 앞에서 선전하며 “문화주택만 지어주는 이면 (남편감으로) 일흔 살도 괜찮아요”라고 말하는 여성들도 있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러한 가정을 꾸릴 수 있는 식민지 조선인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안석영의 말대로 무리한 은행 대출을 해가면서까지 문화주택을 지었다가 빚에 쪼들려 도로 집을 빼앗기는 ‘1930년대판 하우스 푸어’들도 등장했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개혁이 안 되는 문제 중 하나가 부동산이 아닐까. 어떠한 정책과 담론도 근대 이후 뿌리내린 한국인의 집에 대한 소유욕을 완전히 잠재우진 못할 것 같다. 집의 위치와 크기를 자기 과시의 수단으로 여기는 한국인들의 왜곡된 주거상이 먼저 사라지지 않는 한 말이다.

이영아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