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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봤습니다] 설승은 기자가 본 국립 어린이 청소년 도서관의 인문학 강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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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면

지난해 선풍적 인기로 서점가를 달궜던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1년이 넘도록 베스트셀러 목록 한켠을 지키고 있다.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청소년 사이에서도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국립 어린이 청소년 도서관이 4월부터 한 달에 한 번 열고 있는 청소년 대상 인문학 강좌는 12월까지 모두 마감됐다. 21일 오전 10시 ‘청소년 인문학 이야기’ 5월 강좌가 진행되고 있는 어린이 청소년 도서관을 찾았다.

글=설승은 기자
사진=황정옥 기자

‘청소년 인문학 이야기’에 참여하는 학생들은 월별 주제에 맞게 강사가 선정한 책을 읽어온다. 강의가 끝나면 토론도 이뤄진다. [황정옥 기자]

추상적인 인문학을 청소년 눈높이에 맞춰 강의

“여러분이 잘 아는 우화 ‘토끼와 거북이’에 나오는 경주를 떠올려보세요. 과연 공정한 게임일까요.” 강의를 맡은 가톨릭대 김경집 교수가 학생들에게 물었다. “물에서 헤엄치는 거북이에게 육상 경기를 권한 점, 슬그머니 지나쳐 토끼가 잠든 틈을 이용한 점, 이 두 측면을 좀 더 생각해 봅시다.” 김 교수는 우화를 예로 들며 청소년 눈높이에 맞춰 강의를 이끌었다.

이날 주제는 ‘왜 우리는 윤리적으로 정의로운 삶을 살아야 하는가’였다. 어른들도 어려워하는 ‘윤리’와 ‘정의’를 다룬 강좌인데도 도서관 강당을 채운 200여 명의 중·고생 청중은 눈을 빛내며 강사의 말에 집중했다.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뭔가를 수첩에 열심히 적기도 했다. 홍현진(경기도 광명시 가림중 1)양은 “강의가 지루할까 봐 걱정했는데, 예시가 재미있어 내용이 머릿속에 잘 들어온다”고 말했다.

“토끼는 뭍에서 뛰고, 거북이는 물에서 헤엄쳐야 공정한 경기죠.” 김 교수는 “정의는 ‘더불어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라며 “남의 불행을 담보로 내가 행복하다면 정의롭지 못한 것”이라고 말했다. “토끼가 발바닥을 가시에 찔려 절룩거린다면 거북이는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질문에 김 교수가 “‘야타족’이 돼야 한다”고 답하자 웃음보가 터지기도 했다. “물에서 나와 발바닥의 가시를 빼주고 토끼를 등에 태워 헤엄을 쳐 함께 결승점으로 가야죠. 윤리의 첫 시작은 이웃에 대한 관심과 약자에 대한 배려입니다.”

청소년 인문학 이야기는 지난해 시작됐다. 청소년용 특강을 열고 있는 도서관도 있지만 아직까지는 정기 강좌를 찾아보기 힘들다. 국립 어린이 청소년 도서관 박윤희 사서는 “인문학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인문학 강좌를 듣고 싶어 하는 청소년이 늘었다”고 말했다.

올해는 4월부터 12월까지 한 달에 한 번씩 토요일에 2시간 동안 진행된다. 주제는 다양하다. 6월에는 한국 근·현대사, 7월에는 고대 철학을 다룰 예정이다.

강의뿐 아니라 토론도 … 학생 반응도 좋아

김 교수가 ‘안락사는 윤리적인가’라는 화두를 던졌다. “극심한 고통으로 인해 행복하지 않은데 살 필요가 없다.” “부모나 자식을 안락사시켜야 한다고 생각해봐라.” “죽을 확률이 높은데 무의미한 치료는 시간과 돈 낭비다.” 학생들이 여기저기서 손을 들고 의견을 내놓았다. 박연주(경기도 평택시 은혜고 2)양은 “논술 공부할 때 이런 논쟁을 많이 다룬다”며 "강의를 들으면서 다르게, 다양하게 생각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했다.

‘집단 따돌림(왕따)’ 문제가 토론 주제가 됐을 때도 다양한 의견이 쏟아졌다. 노다은(경기도 광명시 가림중 3)양은 “그동안 나도 수없이 왕따의 방관자가 됐었다는 게 충격”이라며 “충분히 맞닥뜨릴 수 있는 상황을 두고 토론한 것이 생각할 거리를 던져줬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정의는 철학책에서 찾을 수 있는 거창한 것이 아니라 이웃을 라이벌 대신 친구로 생각하고 약자를 배려해 함께 행복해지는 것”이라며 “정의를 고민하는 개인이 늘면 사회가 정의로워질 것”이라며 강의를 매듭지었다.

김학현(경기도 양평군 양서고 2)군은 “윤리라는 문제를 다양한 사례로 접근할 수 있어 좋았다”며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문제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준 인문학의 힘을 느꼈다”고 말했다. 김영은(경기도 파주여고 1)양은 “예전의 나는 잠든 토끼를 보고 신나서 혼자 뛰어가는 거북이였을 테지만 이제는 친구를 배려하는 ‘야타족’ 거북이가 될 것”이라며 “이런 강좌가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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