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미세 반도체서 초대형 선박까지 기술혁신 역사 한국 기업이 새로 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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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의 반도체 제조 공정 모습. 삼성전자는 반도체 회로를 더 조밀하게 만드는 분야에서 10년 가까이 세계 1위 기술력을 지켜오고 있다. 올 하반기에는 세계 최초로 20나노미터 선폭의 메모리 반도체 양산에 들어간다.

1 이 달 3일 코니 헤더가드 유럽연합(EU) 기후변화대응 집행위원장이 LG전자 구미사업장을 찾았다. 헤더가드 위원장은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EU 환경부 장관쯤에 해당하는 인물. 그가 LG전자 구미사업장에 들른 이유는 태양전지 생산라인을 돌아보고 LG의 관련 기술력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LG전자의 태양전지 효율에 대해 설명을 들은 뒤, 헤더가드 위원장은 “놀랍다. 세계 저탄소 녹색성장을 이끌 만한 기술이다”라고 평가했다.

2 유럽 최대 에너지기업 로열더치셸은 최근 호주 대륙으로부터 200㎞ 떨어진 심해에서 천연가스를 뽑아내겠다는 계획을 확정, 발표했다. 이 프로젝트에 필요한 해양 플랜트(LNG-FPSO)는 길이 456m, 폭 74m, 높이 100m의 초대형. 무게가 항공모함 3대와 맞먹는 20만t에 이른다.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초대형 해상 구조물이다. 가격이 1조300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로열더치셸은 이 플랜트를 만들 회사로 삼성중공업을 택했다. 세계에서 선박 및 해양 플랜트 기술이 가장 뛰어난 회사로 삼성중공업을 낙점한 것이다.

한국 기업들이 기술력으로 세계에 이름을 날리고 있다. 가장 미세한 반도체에서 세계 최대 해양 구조물에 이르기까지 우리 기업들이 기술의 새 역사를 써 가고 있는 것. 삼성전자는 2002년 90나노미터 회로 선폭의 D램을 개발해 세계 최초로 100나노미터 벽을 무너뜨린 뒤 지금까지 10년 가까이 세계에서 가장 앞서 회로 선폭을 줄여나가고 있다. 이제 새 기록 옆에서 한국 기업의 이름을 발견하는 것은 그다지 새삼스럽지 않은 일이 됐다. 세계에서 제일 높은 빌딩인 828m짜리 아랍에미리트 버즈두바이 건설에는 삼성물산 건설부문이 참여했다.

한국 기업은 기술의 법칙을 바꾸기도 했다. 주인공은 삼성전자다. 2000년대 초반까지 반도체 업계에는 ‘무어의 법칙’이란 게 있었다. 반도체 회로의 집적도가 18개월마다 2배가 된다는 것이다. 인텔의 창업자인 고든 무어가 이런 예견을 해 ‘무어의 법칙’이란 이름이 붙었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 삼성전자가 이 법칙을 깼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해 집적도가 2배가 되는 기간을 1년으로 줄였다. 삼성전자는 아예 “1년 만에 2배가 된다”는 공언을 하기도 했다. 그만큼 신기술 개발에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국내 기업들의 기술력은 적극적인 연구개발(R&D) 투자의 산물이다. 한국의 R&D 투자비 총액은 국내총생산(GDP)의 3.4%로 미국(2.7%)이나 독일(2.5%)보다 높다. 이 같은 R&D 투자의 약 4분의 3(75.4%)이 기업에서 나온다.

개별 기업으로 봐도 그렇다. 영국 정부의 조사에 따르면 전 세계 전기·전자 기업 중에 R&D 투자를 제일 많이 하는 곳이 삼성전자였다. LG전자도 전기·전자 분야 5위에 이름을 올렸다. 통신 분야에서는 SK텔레콤이 세계 3위를 차지했다.


국내 기업들은 금융위기 속에서도 R&D 투자를 공격적으로 늘렸다. 금융위기가 세계를 휩쓴 2009년 미국 기업들은 R&D 투자를 전년보다 5.1%, EU 기업들은 2.7% 줄였으나 한국 기업들은 반대로 8.3% 늘렸다. 기업에 속한 연구인력 수도 2008년 19만7023명에서 2009년에 21만303명으로 6.7% 증가했다. 투자는 결실을 맺었다. 기업들의 기술 수출액은 2008년 25억2959만 달러에서 2009년 35억8290만 달러로 1년 새 41.6% 늘었다. 2001년(6억1911만 달러)에 비하면 8년 사이에 거의 6배가 됐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기업들의 적극적인 R&D 투자와 이로 인한 첨단기술 개발이야말로 한국이 그 어느 나라보다 금융위기에서 빨리 벗어나고, 지난해 세계 수출 순위 7위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보고 있다. 수출 순위는 2009년 9위에서 두 계단 상승했다.

국내 기업들은 앞으로 R&D 투자와 이를 통한 첨단기술 개발의 고삐를 더욱 죌 태세다. 최지성 삼성전자 부회장은 이달 초 열린 삼성그룹 사장단 회의에서 “1등의 자리를 지키려면 경쟁사보다 1년 앞서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글로벌 경쟁사보다 적어도 1년 앞서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고 주문한 것이다.

권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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