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변기·부엌·침실 … 우리 곁의 궁금증에 대한 종합보고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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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그냥 생긴 것은 없습니다. 돌탑 하나에도 숱한 시간이 깃들어 있습니다. 판타지의 세계도 결국은 현실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중앙일보와 교보문고가 공동 기획한 ‘이 달의 책’ 6월 주제는 ‘공간의 틈, 시간의 결’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매력적 만남을 탐(探)하는 책을 권해드립니다.

거의 모든 사생활의 역사
빌 브라이슨 지음
박중서 옮김, 까치
568쪽, 2만5000원

얼마 전 빌 브라이슨의 세계와 조우했다. 그 첫 대면이 『거의 모든 사생활의 역사』였고, 그것은 행운이었다. 그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이 책은 작은 이야기를 통해 큰 이야기로 나아가는 구조를 갖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그가 영국에서 살았던 목사관의 역사와 건축적 특성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는 이를 통해 책 제목 그대로 ‘거의 모든 사생활의 역사’를 아우른다.

 책을 읽으면서 독자는 자기 집 화장실의 수세식 변기에 대해 새삼 감사하게 되고, 오늘날의 편리한 주방이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선학제현(先學諸賢)들의 노고가 있었는지 알게 된다. 예를 들어, 19세기 중반의 부엌은 오직 요리를 하는 용도로만 사용됐고, 뭔가를 씻는 일은 별도의 설거지실에서 이뤄졌으며, 종종 두 방은 상당한 거리로 떨어져 있었다. 어떤가?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중세 때 식탁은 누추한 집의 판자를 가리키고, 좌석은 평범한 벤치(bench)였다. 프랑스어의 ‘방크(banc)’에서 유래한 이 단어에서 연회(banquet)라는 단어가 나왔다. 빌 브라이슨은 “우리가 삶에서 누리는 온갖 종류의 편의가 얼마나 최근에야 시작됐는지를 망각하기 쉽다”고 말했다. 사진은 중세의 연회장면.

 이 책에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수도 없이 많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조지 워싱턴과 토머스 제퍼슨이 각각 마운트 버논과 몬티첼로라는 자기 집을 짓는 이야기다. 두 청년은 서로 의견을 나눠가며 훗날 미국의 대표적 문화유산이 될 이 두 집의 건설에 착수한다. 각각 무려 30년과 50년이라는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 와중에 독립전쟁도 치렀으니 한 편으로는 나라를,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집을 지은 셈이다.

 빌 브라이슨의 세계는 넓고 풍성하다. 책의 분량은 500쪽을 훌쩍 뛰어넘는다. 그 후유증으로 나는 지독한 수면부족을 겪었으나 일단 그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이상 멈출 수 없었다. 내친 김에 『거의 모든 것의 역사』『발칙한 유럽 산책』『나를 부르는 숲』까지 독파했고, 지금은 잠시 숨을 고르는 중이다.

 사실, 아직도 갈 길은 멀다. 읽어야 할 책이 많이 남아 있다. 『발칙한 영국산책』『발칙한 미국학』『셰익스피어 순례』 등등. 빌 브라이슨은 정말이지 ‘발칙하게도’ 생산적인 작가가 아닐 수 없다.

 굳이 분류하자면 수필일 그의 책들 뒤에는 대단한 참고문헌과 색인이 붙어 나온다. 쓰기 전에 엄청나게 읽고 조사했다는 이야기다. 온라인 백과서전 위키피디아에는 그의 대표작인 『거의 모든 것의 역사』의 오류에 대한 내용이 있는데, 현재까지 28개가 보고됐다. 물론 그 자체로는 결함이겠지만 건축가가 되기 이전에 과학도를 꿈꿨던 나에게 이 책만큼 현대과학의 모든 전선을 잘 설명해주는 책은 없었다.

 사람들은 보통 빌 브라이슨 하면 유머러스한 문체와 끈질긴 필력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내게는 그는 치밀한 관찰과 방대한 조사의 작가로 더 다가온다. 관찰과 조사는 문학뿐 아니라 내 분야인 건축을 포함한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독자로 하여금 킥킥거리게 하고, 한번 손에 잡으면 밤을 새우게 하는 매력 뒤에 숨어 있는 빌 브라이슨의 진짜 능력이다. 『거의 모든 사생활의 역사』는 이 비범한 이야기꾼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좋은 입문서다.

황두진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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