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 딛고 거대 병원 개혁 이끄는 맹렬 여성

미주중앙

입력

어렸을 때 불의의 교통사고로 장애인이 됐지만 이를 극복하고 뉴욕의 대표적 병원에서 약사로 성공한 데 이어 병원 운영 시스템을 개혁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는 한인이 있다.

한인 1.5세인 린 김(47·사진)씨. 그는 컬럼비아·코넬 대학 병원 등 4개 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뉴욕 프레스비테리안 병원 혁신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1만7000여 명이 일하는 거대 병원에서 총 20명뿐인 위원 가운데서도 4개 병원을 총괄하는 사람은 김씨를 포함해 3명뿐이다.

그는 현재 심장·항암 치료의 안전문제 개선 등을 위해 4개 병원 암센터 디렉터들은 물론 전문의 등과 매일 미팅을 하며 연구를 이끌고 있다.

이번 주(16~20일)에만 모두 15차례의 미팅을 했다는 그는 “일 하는 것 자체가 감사하고, 너무 즐겁다”고 강조했다.

◆"죽고 싶었다"=김씨가 미국엔 온 건 13살 때인 1977년. 김씨의 부모는 메릴랜드주 볼티모어로 이민와 그로서리를 차렸다. 늘 적극적이고 열정적이었던 김씨는 곧 우등생이 됐다. 춤을 좋아했고, 치어리더를 하며 백인들이 대부분이던 학교에서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15세였던 해의 봄, 상상하지도 못한 일이 생기고 말았다. 한 친구가 몰던 스포츠카를 타고 쇼핑을 가던 중 차량이 전복되는 대형 교통사고를 당한 것.

이 사고로 몸 안팎에 많은 피를 흘리고 척추 뼈도 부러졌다. 신경을 다쳐 결국 하반신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하게 됐다. 사춘기 소녀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었다.

“8개월 동안 병원에 입원했고 이후에도 재활병동에 있어야만 했어요. 그곳은 이 세상 모든 장애인이 모인 곳 같았어요. 그런 식으로 살고 싶지 않았고, 여러 번 식당에서 식사를 한 뒤 칼을 숨겨 베개 밑에 숨겨놨어요. 목숨을 끊으려는 것이었죠. 실제 스스로 불을 질러 소동이 벌어진 적도 있죠.”

그 때부터 1주일에 한 번 이상은 정신과 치료도 받았다고 한다. 김씨는 “당시 나를 담당했던 닥터 고든이라는 세라피스트가 나를 살렸다”며 “내가 처한 현실을 받아들이는 법을 알게 해 줬다”고 밝혔다.

부모의 헌신도 큰 힘이었다. 아버지 송성재씨는 온몸에 지압을 해 줬고, 어머니 김해자씨는 음식을 먹여 줬다.

“제가 새로 태어난 순간이었어요. 장애인으로서 어떻게 옷을 입고, 밥을 먹고, 운전을 할 수 있는지 간난아기가 걸음마 하듯 하나하나 배웠죠.”

김씨는 사고 후 1년 반 만에 병원을 나와 학교로 돌아갔다. 뒤떨어진 공부를 따라잡기 위해 매일 새벽까지 공부했다. 떨어졌던 성적은 다시 제자리를 찾았고 졸업 때 우등상을 받기까지 했다.

◆첫 홀로서기=그는 집에서 가까운 메릴랜드 대학에 진학, 생화학을 전공했다. 3년 만에 우등생으로 조기 졸업한 그는 처음에는 의대를 가려 했지만 육체적으로 덜 힘든 약사를 하라는 아버지의 조언으로 약대를 선택하기로 했다.

그가 선택한 곳은 펜실베이니아주의 필라델피아약대(PCP&S). 부모님과 처음으로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대학 때도 사실 아버지께서 차로 학교까지 데려다 주셨어요. 그 때까지도 부모님께서 제 손과 발이 돼 주셨던 거죠. 처음으로 혼자 살아가야 했기 때문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혼자 산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나약해질 때마다 기도(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다)하며 책에 더 집중했다. 그 결과 과 수석으로 학교를 졸업했다.

◆남편과의 만남=대학 4학년이던 1987년, 남편 콜린 김(47)씨를 만났다. 당시 캘리포니아공대를 다니던 남편은 부모가 있는 필라델피아에 와 있다가 김씨를 만나 한눈에 반했던 것.

2년 뒤 결혼은 김씨에게 큰 기회를 가져다 줬다. MIT와 스탠퍼드, 카네기멜론 등에서 공부한 남편을 따라다니며 보스턴의 베스이스라엘병원, 스탠퍼드 대학병원, 존스홉킨스병원 등에서 임상 약사로 근무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1996년 뉴욕 프레스비테리안 웨스트체스터병원에 임상 약학과 디렉터로 영입됐다.

“사실 스탠퍼드나 존스홉킨스 병원 등 미국의 톱 병원과 비교했을 때 부족한 점이 많았어요. 이들 병원에서는 약사들이 전문가로서 의사들을 교육했죠. 의사들은 우리에게 어떤 약을 투여하는지를 의논했어요. 반면 우리 병원의 간호사들은 그야말로 제약실에서 약만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는 곧바로 개혁에 들어갔다. 매일 약사들을 교육하고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했다. 그는 “2003년까지 디렉터로 일하면서 의사들의 마인드를 새롭게 하고 약사들도 수동적인 태도를 버리게 했다”고 설명했다.

◆병원 개혁 선두주자=김씨는 2003년 겨울 어느 날 병원의 최고운영책임자(COO)인 밥 켈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병원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 새로 구성하는 혁신위원 위원 10명 중 김씨를 추천하겠다는 것. 변화를 이끈 그의 성과를 인정한 것이었다.

“위원회는 그야말로 ‘007의 제임스 본드’처럼 교육을 받았어요. 당시 병원 측은 최고 중의 최고만을 뽑아 병원을 싹 바꾸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우도 파격적이었다. 수개월 동안의 교육은 물론 연봉 인상, 보너스와 2년 동안의 임무를 끝내면 디렉터 이상급으로의 승진을 보장했다.

그러나 일은 그만큼 혹독했다. 그에게 맡겨진 임무는 컬럼비아·코넬대 병원 등 4개 병원 응급실의 개혁을 현실화하는 것. 이전까지 ‘약사’ 분야에만 종사하던 그에게 ‘응급실’은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그는 “작은 물고기가 처음으로 바다에 혼자 떨어진 것 같았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처음 시작한 것은 인터뷰였다. 각 병원의 응급실장 등 책임자들을 모두 개별적으로 만났다. 각 병원에 30여 명씩 120명이 넘는 사람들로부터 응급실 운영의 문제점과 해결책 등을 들어 하나 하나 기록했다.

“매일 오전 5, 6시에 나가 퇴근 후에도 다음날 오전 2시까지 일하기를 밥 먹듯이 했죠. 미팅과 연구 끝에 800만 달러의 예산으로 응급실 대수술에 들어갔습니다.”

결과는 좋았다. 응급실에 환자들이 도착해 응급치료를 받고 병실로 이동하기까지 24시간이었던 컬럼비아대 병원의 경우 12시간으로, 코넬대 병원은 18시간에서 9시간으로 단축됐다.

이러한 성공 사례가 알려지자 존스홉킨스대에서는 응급실 개선을 위해 김씨에게 특별 세미나를 부탁하기도 했다.

◆이제는 한인사회=이후 그는 병원 운영을 담당하는 운영발전부서로 옮겨 1년여 동안 디렉터로 근무했다. 2006년 병원 측은 그에게 다시 혁신위원회에서 일하길 주문했다.

이제는 심장병과 암 관련 안전문제를 줄여야 하는 임무가 맡겨졌다. 김씨는 “지금은 익숙해져서 처음 할 때에 비해서는 스스로 여유를 가지고 있지만 책임감은 더 커졌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우연히 정보가 없어서 치료를 못 받는 한인들을 접하면서 한인사회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한인들은 문화·언어·재정 등 여러 장벽 때문에 좋은 의료혜택을 못 받는 경우가 많아요. 앞으로 의료혜택의 기회를 한인들이 더 누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연구하고 싶어요. 그리고 그분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도 찾고 싶습니다.”

김씨와의 인터뷰는 최근 한 차례의 만남과 수 차례 전화통화를 통해 이뤄졌다. 그는 20일 기자와의 마지막 통화에서 “내가 장애인이라는 표현을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나 스스로 장애인이라고 생각하고 살지 않을 뿐 아니라 장애가 성취를 하는 데 전혀 방해가 안됐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였다.

김씨가 가진 삶에 대한 열정과 도전 정신. 그에게 ‘장애’는 장애가 아닌 피부색이 다르고, 모습에 차이가 있는 것과 같은 ‘다름’의 하나일 뿐이었다.

강이종행 기자 kyjh69@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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