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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가 日헌법 완성한 순간, 아시아의 고통은 시작됐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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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호 30면

메이지 헌법 발포식. 이 의식으로 일본 천황은 허수아비인 국가 제사장에서 명실상부한 국가원수로 발돋움했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망국의 몇 가지 풍경
⑨이토의 이중성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일본은 1873년(메이지 6년) 2월 11일을 초대 신무천황(神武天皇)의 즉위일이라고 선포했다. 현재 신무천황은 실재하지 않았던 허구의 천황으로 인정하고 있지만 당시로서는 메이지 천황의 권위를 초대 천황에게서 찾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8세기에 편찬된 일본서기(日本書紀)의 즉위 날짜를 양력으로 환산해 이른바 기원절(紀元節)로 삼은 것이다.

그리고 1889년 2월 11일 헌법 발포식을 했다. 메이지 천황은 궁중 삼전(三殿)에서 하늘과 역대 천황들에게 헌법을 고하는 것으로 의식을 시작해 이세(伊勢)신궁과 야스쿠니(靖國)신사 등으로 사신들을 보내고,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인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의 무덤에도 이 사실을 고했다.

헌법 발포식의 하이라이트는 메이지가 새 정전(正殿)에서 전통 복장을 벗고 군복으로 갈아입은 후 내각 총리대신에게 헌법을 하사하는 의식이었다. 헌법이 천황이 국민에게 내리는 선물이란 의미였다.

1 이토는 일본 태자를 방한시켜 두 나라의 선린관계를 과시하려 했다. 왼쪽이 일본 태자 요시히토, 가운데가 영왕 이은. 2 조선 복장의 이토 부부. 윗줄 가운데가 이토, 아랫줄 왼쪽에서 둘째가 부인 우메코. 이토는 풍류통감이라 불릴 정도로 주색에 심취했다.

이 행사로 메이지는 허수아비 제사장에서 명실상부한 국가원수로 발돋움했다. 이날 메이지 헌법을 하사받은 총리대신은 1876년 한·일 수호조규를 체결했던 구로다 기요타카(<9ED2>田<6E05>隆)였다. 그러나 사실상의 주역은 이토 히로부미였다. 1889년 1월 헌법 제정에 관한 공으로 최고훈장인 욱일동화대수장(旭日桐花大綬章)을 받은 데서 알 수 있듯이 헌법도 이토가 만든 것이었고, 헌법 발포 의식도 이토가 주도한 것이었다. 이토는 헌법 연구에 전념할 시간을 갖기 위해 내각 총리대신에서 보다 한가한 추밀원(樞密院) 의장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었다.

이토는 평민 출신이었지만 의회의 권한이 강한 영국식 헌법을 구상했던 민권론자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를 일축하고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萬世一系) 천황이 통치한다(제1조)”고 규정한 전제 군주헌법을 만들었다. 메이지 헌법 제3조는 “천황은 신성하며 침범할 수 없다”고, 제4조는 “천황은 국가의 원수로서 통치권을 총괄한다…”는 조항이다. 훗날 아시아의 많은 민중은 물론 일본 민중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는 단초가 12조의 “천황은 육·해군의 편제(編制) 및 상비군의 숫자를 결정한다”는 조항이다. 원래 “천황은 육·해군을 통수한다. 육해군의 편제는 칙령(勅令)으로 정한다”고 돼 있었다. 이 경우 칙령을 심의하는 추밀원에 군부 통제권이 있게 되지만 이토가 천황에게 ‘육·해군의 편제와 상비군 숫자’ 결정권까지 넘기면서 군은 의회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됐다. 이것이 쇼와(昭和·1926~89년)시대에 군부가 내각의 통제권을 벗어나 천황에게만 소속된다는 통수권(統帥權) 개념으로 각종 침략전쟁을 일으키는 빌미가 된다.

역으로 일본군이 벌인 모든 침략전쟁은 천황이 무한책임을 져야 한다는 논리가 자동적으로 성립한다. 1890년 7월 1일 총선거가 실시되면서 만 스물다섯 살 이상으로 국세 15엔 이상을 납부한 남자에게 선거권이 주어졌는데, 전체 인구의 약 1%에 불과했다. 그해 11월 천황이 참석한 가운데 첫 의회가 열렸다. 귀족원 의장은 평민 출신의 백작 이토 히로부미였고, 중의원 의장은 향사(鄕士·지방토착무사) 출신의 나카지마 노부유키(中島信行)였다. 이처럼 일본은 헌법 공포와 총선거를 통해 근대국가에 한발 더 다가갔는데 이토가 이 모든 작업을 총괄했다.

이토는 평민 출신이면서 전제 군주헌법을 제정하고 귀족원 의장이 된 것처럼 상호 모순된 정치행보를 보였다. 러시아에 대해서도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가쓰라 다로(桂太<90CE>) 등의 개전론에 맞서 외교협상론을 주장해 ‘공러병(恐露病)’에 걸렸다는 비난까지 받았다. 그러나 이토의 대러시아 협상론의 요체는 만주와 한반도를 교환하자는 ‘만한교환론(滿韓交換論)’이었다. 만주는 러시아가, 한반도는 일본이 차지하자는 것으로서 야마가타의 군사 해결 노선과 방법만 달랐다. 1903년(고종 40년, 메이지 36년) 4월 이토는 야마가타의 저택에서 가쓰라,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90CE>)와 회담을 하고 4개 항을 합의하는데, 3항이 ‘대한제국에 대한 우선권을 러시아가 인정하게 한다’이고, 4항이 ‘일본은 만주에 대한 러시아의 우선권을 인정하고 이를 통해 대한제국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한다’는 것이었다.

전쟁이든 외교든 수단이 문제일 뿐 대한제국 문제의 근본적 해결은 일본의 강점이란 것이므로 이토는 한국과 악연일 수밖에 없었다.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 내각은 1905년 10월 27일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다”고 결정했다. 그러나 하야시 주한 공사만으로 외교권을 뺏는 대과제를 수행하기 어렵다는 생각에서 ‘칙사’를 파견하기로 했다. ‘만한교환론’의 구상자 이토가 칙사가 되면서 한국과의 악연이 본격화된다.

이토는 1905년 11월 고종을 알현해 외교권 박탈을 통보하는데, 이토가 귀국해서 천황에게 보고한 대한제국봉사기사적요(大韓帝國奉使記事摘要)는 ‘위장된 온건론자’ 이토의 진면목을 잘 보여준다. 을사늑약에 고종 황제가 불만을 표시하자 이토는 “폐하는 불만을 말씀하시지만 제가 한번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대한제국은 어떻게 오늘날까지 생존할 수 있었습니까? 또 대한제국의 독립은 어떻게 보장되었습니까? 폐하는 그러한 사정을 알면서도 불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라고 윽박질렀다.

고종은 “대외관계 위임을 전면적으로 거부하지는 않지만 일본이 그 내용의 실제를 취하는 대신 한국에도 형식적인 명목은 남겨 달라”며 “예를 들면 사신의 왕래”라고 말했다. 형식상의 외교권만이라도 달라는 고종에게 이토는 “외교란 형식과 내용을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거절했다. 이토는 이 조약을 거부할 경우 “한층 불리한 결과를 각오해야 한다”고 협박해 을사늑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이토는 초대 통감으로 부임했다.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자 사방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이토는 다시 한국민의 국적(國賊)이 되었다.

이토의 통감정치는 모순의 극치였다. 이토는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초대 조선 총독이 되는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등이 주장하는 즉각 병합론(倂合論)에 반대하고 점진 병합론을 주장했다. 한국을 강점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한국 병합을 원치 않는 것처럼 위장했다. 이토는 1907년 10월 16일 황태자 요시히토 친왕(嘉仁親王·훗날의 다이쇼 천황)을 방한시켰다. 이때 순종(純宗)은 황태자 영친왕과 인천까지 가서 영접하고 함께 서울로 올라오는데, 이런 행사를 통해 이토는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지 않을 것처럼 위장했다.

그러나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2대 총독) 조선주차군 사령관에게 전국 각지의 의병을 잔혹하게 진압하게 한 데서 그 본질이 드러난다. 이토는 또 풍류통감이라고 부를 정도로 주색(酒色)에도 심취했는데, “취해서 미인의 무릎을 베고 눕고, 깨어서 천하의 권력을 잡는다(醉臥美人膝,醒掌天下權)”는 그의 한시(漢詩)가 이런 성향을 잘 말해준다. 그래서 통감부 시절 서울 묵정동 일대에 신마치 유곽(新町 遊廓), 일본군이 주둔한 용산 일대에 모모야마 유곽(挑山 遊廓) 같은 기생촌이 번성하면서 일종의 예인(藝人) 문화였던 조선의 밤문화가 창녀 문화로 바뀌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이토의 점진 병합론은 일본과 한국의 매국친일파들의 비판을 받았다. 1909년 1월 순종이 남쪽의 대구·부산·마산과 북쪽의 개성·평양·신의주 등을 순행(巡幸)할 때 이토는 직접 호종하기도 했는데, 도야마 미쓰루·우치다 료헤이 등의 흑룡회와 이용구·송병준 등의 일진회는 한국인들의 존황심(尊皇心)만 높였다면서 이토를 비난하고 나섰다. 그러나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小松綠)의 조선병합의 이면(朝鮮倂合之裏面)에 따르면 이토는 1909년 4월 총리대신 가쓰라, 외무대신 고무라와 3자 회합에서 병합에 이의가 없다고 동의했다.

이토는 1909년 6월 14일 부통감 소네 아라스케(曾<79B0>荒助)에게 통감 자리를 물려주었고, 일본 각의는 7월 6일 ‘한국 병합에 관한 건’을 통과시켰다. 이토는 그해 10월 러시아 방문길에 올라 러일전쟁 격전지였던 뤼순(旅順)의 203고지를 둘러보고 ‘1만8000명의 뼈를 묻고 있는 산’ 운운하는 시로써 일본 근대사의 감회를 토로했다. 그리고 창춘(長春)을 거쳐 하얼빈으로 향했다. 하얼빈 역사(驛舍)의 찻집에서 대한국의용군참모중장 겸 독립특파대장 안중근(安重根)이 이웃 국가에는 큰 고통이었던 일본 근대사의 성취와 이토의 모순된 정치행각을 끝장내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