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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스페셜 - 목요문화산책] 도스토옙스키는 왜 이 그림에 주목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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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문경 십자가 시신 사건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분석 결과 김모씨의 단독 자살로 최종 결론이 났다. 혼자서 예수의 십자가형을 그토록 정교하게 재현하는 게 가능한지 여전히 믿기 어렵지만, 김씨가 스스로 원했다는 것만은 정황상 확실해 보인다. 평소에 말이 없고 내성적이었다는 김씨는 어쩌다 이런 기괴한 일을 저지르게 됐을까?

러시아의 작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1821~81)가 이 사건을 봤다면 한마디 했을 법하다. 그는 최후의 대작 『카라마조프 가(家)의 형제들』(1880)에서 말없이 명상에 잠기곤 하다가 어느 날 큰일을 저지르는 사람들에 대해 언급했다.

그림 ① 명상하는 사람(1876부분), 이반 크람스코이(1837∼1887) 작, 캔버스에 유채, 러시아 미술관, 키예프.


도스토옙스키는 러시아 민중 중에 구체적인 생각이 아닌 막연한 명상에 빠지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그런 사람들은 “명상 중에 받은 인상을 여러 해 동안 가슴 속에 쌓아 올리다 결국에는 영혼의 구원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날지도 모르고, 혹은 갑자기 자기 동네에 불을 지를지도 모르며, 어쩌면 그 두 가지를 동시에 저지를지도 모른다.” 그는 19세기 러시아의 대표적인 화가 이반 크람스코이의 ‘명상하는 사람’(그림 ①)이 바로 그런 인물을 묘사했다고 보았다.

그림 ② 황야의 그리스도(1872부분), 이반 크람스코이 작, 캔버스에 유채, 트레차코프 미술관, 모스크바.

 당시 러시아는 농노제(農奴制)가 폐지되고 사회주의 등 신사상이 퍼지면서 정교회(正敎會)의 권위는 흔들리고 있었다. 즉, 늘 있어왔던 세상의 부조리와 새로 추가된 혼란을 전통 가치관으로 설명할 수 없게 됐다. 인텔리겐치아(지식계급)는 신사상을 적극 흡수한 반면, 그럴 기회가 적은 민중 중에는 넋을 놓고 ‘명상’에 잠기다 광신에 빠져 마치 김씨처럼 자해(自害)를 하거나 인텔리겐치아의 감화로 급진적인 무신론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었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스메르자코프는 후자였다. 그는 탐욕스럽고 음탕한 지주인 표도르 카라마조프의 하인이자 사생아인데, 표도르의 둘째 적자인 젊은 지식인 이반의 영향을 받는다. ‘설령 신이 존재한다 해도 그가 만든 부조리투성이의 세상을 인정할 수 없다. 이 문제를 고민하고 인류를 사랑하는 영웅적 인간은 부조리를 없애기 위해 기존 종교의 도덕률과 법을 초월한 행위를 할 수 있다.’ 이것이 이반의 사상이었다.

그의 영향을 받은 스메르자코프는 누가 봐도 쓰레기인 표도르를 살해하고 자신이 보기엔 같은 쓰레기인 표도르의 첫째 적자 드미트리에게 뒤집어 씌운다. 드미트리는 아버지와 한 여인을 두고 다투며 그를 죽여버리겠다고 떠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반은 이 살인에 대한 자신의 사상적 영향을 인정하려 들지 않고 혐오스럽게 볼 뿐이다. 나중에야 그것을 인정하고 이번엔 죄의식에 시달린다. 그래서 스메르자코프는 회의에 빠진다.

 이처럼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막장 드라마 같은 줄거리를 들춰보면 21세기에도 끝없이 되풀이되는 철학적 질문들이 심연의 깊이를 지니고 깔려 있다. 특히 이반이 그의 동생이자 사상적 대결자인 수습 수도사 알료샤에게 읊어주는 자작 서사시 ‘대심문관’을 보면 왜 21세기 한국에도 십자가 시신 사건 같은 광신 행위가 나타나는지 나름의 답을 들을 수 있다.

 15세기 무렵 무시무시한 종교재판을 주재하던 대심문관이 잠시 지상을 방문한 그리스도를 보게 된다. 그는 예수를 체포해 가두고는 묻는다. “왜 우리를 방해하러 왔소?” 그가 퍼부은 말을 요약하면 이런 것이다.

그림 ③ 그리스도의 유혹(1579∼81), 틴토레토(1518∼1594) 작, 캔버스에 유채, 산 로코 신도 대회당, 베니스.

 ‘복음서를 보면 당신 예수는 황야에서 수행할 때 악마의 세 가지 유혹-돌을 빵으로 만들라, 절벽에서 뛰어내려 다치지 않는 신비를 보이라, 악마에게 절을 해 전 세계를 얻으라-을 뿌리쳤다. 이것은 당신이 인간을 식량과 기적과 절대권력으로 굴복시켜 노예로 만들길 원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당신은 인간이 자유의지로 당신을 믿기를 바란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간은 나약해서 자유를 감당하지 못한다.’

 이 구절은 크람스코이의 또 다른 작품(그림 ②)의 영향을 받았을지 모르겠다. 황야에서 고행 중인 그리스도가 남루한 옷과 앙상한 손발, 퀭한 눈으로 고뇌에 빠져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악마의 속삭임과 싸우고 있는 것이리라. 르네상스 대가 틴토레토의 작품(그림 ③)에서는 악마가 모습을 드러내고 돌을 쳐들며 어서 빵으로 만들라고 꾄다. 악마는 놀랍게도 천사와 다름없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그처럼 빵의 유혹은 강한 것이다. 대심문관의 다음 말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대부분의 인간은 먹을 것을 위해 자유를 기꺼이 희생할 수 있으며, 기적과 권위에 매달린다. 그러면 당신 예수는 이 인간들은 버릴 것인가? 자유의지로 당신을 믿는 소수의 지혜롭고 강한 인간들만 돌볼 것인가? 우리는 당신의 이름으로 나약한 인간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신비를 보이고 권위를 세워서 그들에게 안정을 주었다. 우리를 방해하지 말라!’

 이런 대심문관은 노예적인 광신을 방치하거나 조장하게 된다. 오늘날 한국에서도 십자가형 같은 극단적인 행위는 아니더라도 준(準)광신 행위를 장려하는 교회들이 있지 않은가? 물론 이것을 개탄하고 본래 그리스도가 원한 자유의지에 의한 믿음을 강조하는 교회들도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대심문관’은 교회권력의 풍자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반은 대심문관이 위선자가 아니라 정말로 연약하고 어리석은 인간을 구원하겠다는 열망으로 고민하다 그런 파시스트적 결론에 이르렀다고 했다. “모든 운동의 선두에 섰던 인간 중에는 반드시 대심문관 같은 인간이 있었다’고 이반은 단언한다. 국민 또는 인민을 구원하겠다는 열망으로 혁명을 일으킨 다음 독재자가 된 동서고금의 정치지도자들에게는 대심문관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문소영 기자

“나는 영혼의 심연 묘사하는 사실주의자”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이반은 부조리로 가득 찬 현실에 분노하고 그에 맞서기 위해 ‘초법적 영웅’을 꿈꾸나, 자신의 사상에 완전한 확신을 갖지 못한다. 그는 바로 작가의 자화상이다. 도스토옙스키(사진)는 급진 사회주의 서클에 참여하다 체포돼 시베리아에서 8년 유형생활을 했다. 그때 그리스도교에서 영혼의 위안을 받아 신자로 변모했으며 좀 더 온건한 개혁주의자로 변했다. 이때 겪은 내적 갈등과 사상의 변화 과정이 그의 소설에 생생한 심리 묘사와 함께 담겨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나를 심리학자라고 부르지만 나는 단지 더 높은 의미에서 사실주의자일 뿐이다. 즉 나는 인간 영혼의 모든 심연을 묘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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