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무정자증' 10억 고릴라 '돌부처' 아니라 쓸 기회가 없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나는 ‘고리롱’. 올해 2월 17일 서울동물원에서 죽었다. 48년쯤 살았나, 사람으로 치면 90세 정도다. 나는 로랜드고릴라다. 아프리카 열대우림에서 태어났다. 5살 때 사냥꾼에게 잡혀 한국으로 보내졌다. 그 때부터 창경궁·서울대공원을 옮겨다니며 철창 안에 홀로 갇혀 사는 신세가 됐다. 그렇게 혼자 산 지 34년, 사람으로 치면 환갑이 넘은 나이쯤 됐을까. 암컷 ‘고리나’가 사육장으로 들어왔다. 당연히 나는 관심이 없었다. 사람들은 나와 고리나가 사이가 좋지 않아서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발기부전 치료제를 섞은 사료나 ‘짝짓기 비디오’는 나에게 소용이 없었다. 앙칼지고 젊은 암컷에게 밀려 우유도 구석에서 몰래 마시고, 밥도 등 지고 앉아 조심스레 먹을수 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내가 장수했다고 생각한다. 몸값이 10억이나 나가니 귀한 대접을 받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죽어서도 편하게 눈을 감지 못하고 부검 당했다. 그리고 살갗과 뼈를 박제 처리하려고 한다. 죽은 나에게 ‘무정자증’이란 딱지까지 붙였다.

지난 2월 숨진 10억짜리 ‘고리롱’을 두고 논란이다. 서울동물원측의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후손을 못 남기고 떠났기 때문이다.

동물원은 지난해 2월부터 ‘실버리본프로젝트’를 진행해 후손을 남기려고 했다. 사후엔 부검해 정자를 체취해 인공 수정까지 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지난 15일 동물원은 ‘무정자증’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야생 동물 전문가의 의견은 다르다. 서울동물원·에버랜드동물원 원장을 지낸 국내 동물학의 1인자인 서울대학교 신남식 교수는 “고리롱의 무정자증은 후천적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고릴라와 같은 영장류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번식이 가능한 나이가 있다”는 것이다. 신 교수는 “고리롱 같이 오래 혼자서 번식 기회를 갖지 못하면 생체 리듬이 깨지고 생식 기능이 퇴화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라마르크(Lamarck)는 1809년에 출간한 『동물 철학』에서 ‘용불용설’을 설명했다. 동물이 어떤 기관을 다른 기관보다 더 자주 쓰거나 지속적으로 사용하면, 그 기관은 강해지고 커지게 된다. 반면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으면, 점차 약화되고 기능도 쇠퇴한다는 것이다.

고리롱은 5세 때인 1968년 창경원에 잡혀와 34년간 혼자 살았다. 무리 생활을 하는 아프리카의 자연 상태가 아닌 좁은 철창안에서 오랜 기간동안 홀로 사육당했다. 고리롱의 생식기능은 혼자 사는 동안 정지됐다. ‘용불용설’을 적용하면 무정자증이 생기는 게 당연한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암컷에 동요할 리가 없다. 결국 인간이 그의 생식기능을 망쳐놓고, 죽은 뒤 ‘무정자증’이라는 꼬리표까지 붙인 셈이다.

현재 고리롱의 사체는 서울대공원 동물병원에 냉동보관 중이다. 표피와 골격을 박제 처리할 예정이었으나 일부 시민의 반대에 부딪혀 보류된 상태로 아예 소각 여부를 검토하고 있다.

심영규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