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청춘은 맨발이다 (16) 첫사랑 혜화동 여인(상)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6면

1970년대 어머니와 함께한 신성일씨. 영화배우로서 최고의 영광을 누린 그였지만 60년대 초 데뷔 시절 그는 연기에서도, 사랑에서도 풋내기였다. [중앙포토]


원숙한 여인과의 사랑.

스탕달의 소설 『적과 흑』의 주인공 쥘리앵처럼, 내가 생애 처음으로 경험한 사랑의 형태였다.

 1960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내일이면 크리스마스’라는 설렘이 가슴 속에서 요동쳤다. ‘로맨스 빠빠’에 출연하면서 나름 대중에게 얼굴을 알렸지만 나는 아직 초짜 배우의 티를 벗지 못했다. 외로움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당시 신필름에 정동일이라는 견습 배우가 있었다. 나이도 같고, 처지도 비슷해 우리는 동병상련을 느꼈다. 우리의 호주머니는 궁색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5만환이라는 비교적 많은 월급을 받았지만 돌아서면 돈이 없었다. 신필름에서 내 월급 지불은 가장 후순위였다. 월급이 한 달씩 늦게 나오다 보니 ‘외상 인생’이 돼 버렸다. 가회동 하숙비는 매번 한 달씩 밀렸고, 신필름 주변 다방과 당구장에도 늘 외상이 달려 있었다. 그 날 정동일은 우울한 마음을 다 안다는 듯 내게 “좋은 데 가자”고 제안했다. 사실 마음이 너무 허전해 아무데나 끌려가고 싶은 기분이었다.

 정동일의 손에 끌려 지금의 서울 광화문 동화면세점 자리 맞은편의 감리회관 다방에 갔다. 다방 마담은 굉장히 인심 좋게 생긴 여인이었다. 정동일은 평소 그 여인과 친한 모양이었다. 마담은 밤이 되자 다방 문을 닫고, 자신의 친구들이 모이는 혜화동의 어느 한옥으로 우리를 데려갔다. 혜화동은 당시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부촌이었다. 그 집은 ‘ㄷ’자 형태로 제대로 된 한옥의 전형이었다.

 그 곳엔 마담의 친구 세 명이 있었다. 그들은 사랑채에 상을 근사하게 차려서 내왔다. 남자라곤 우리 둘밖에 없었다. 젊은 시절부터 남다른 야심가였던 나는 주변에 앉아있던 여인들에게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보다 7~8살 연상의 여인이었다. 월급은 밀려있는데 돈은 어디서 구하고 생활을 어떻게 꾸려가나, 신필름에서 어떤 작품으로 성공할 것인가라는 생각만 머리 속에 꽉 차 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술 경험이 전혀 없던 나는 몇 잔의 술을 마시고 나가 떨어졌다. 내가 마신 술은 위스키였던 것 같다. 그 위스키는 미군 부대에서 나온 것이리라.

 일어나 보니 정동일과 마담 친구들이 모두 한 방에서 자고 있었다. 야간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라 어차피 집으로 갈 수도 없었다. 목이 마르고 오줌이 마려워 견딜 수 없었다. 비틀거리면서 살펴보니 화장실은 대청마루에서 15m쯤 떨어진 대문 쪽에 있었다. 그 날 따라 보름달이 휘영청 밝게 떠있었다. 화장실에서 마당으로 나왔는데 대청마루에 웬 여인이 서 있는 것 아닌가! 세상에,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았다. 그 여인은 드레스 같은 아름다운 잠옷을 걸치고 있었다.

 “성일아, 너 연애 해봤냐? 나이 먹은 여자와 사귀어 봐.”

 일전에 신상옥 감독이 ‘백사부인’을 촬영하며 최은희와 키스하지 못하는 내게 충고했던 이 말이다. 머리 속에 하나의 계시처럼 메모리돼 있던 이 말이 그 순간 암호 풀린 컴퓨터 파일처럼 작동했던 것 같다. 여자와 키스 신도 제대로 못해내면서 무슨 배우냐는 자책감을 가슴 속에 품고 있던 터였다. 신 감독은 이 상황을 예상했던 것일까.

 홀린 듯 그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 여인은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슬며시 끌었다. 나는 거부하지 못한 채 안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신성일
정리=장상용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