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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진 후 일본 … 폐쇄냐 개방이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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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정재정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한 지 한 달 반 만에 일본을 다녀왔다. 대지진 이후 일본 사회의 변화를 살펴보고 한·일 관계의 개선을 모색하기 위해서다. 도쿄는 약간의 자숙 분위기를 제외하면 그 이전과 다름없었다. 진앙지와 가까운 센다이의 시내도 활기를 되찾았다. 한국에서 걱정하는 것보다 일본은 훨씬 안정돼 있었다.

 일본은 크고 강한 나라다. 이번 대지진에서 국민총생산의 10%가 손실을 입고 3만여 명의 사망·실종자와 15만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만난 일본인 중에서 복구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일본은 새롭게 부흥할 것이라고 모두 확신했다. 엄청난 자신감이다. 어림잡아 일본의 국토는 남한의 4배, 인구는 2.5배, 국민총생산은 5배, 국가예산은 10배다. 덩치만이 아니다. 대지진이 발생한 순간 일본에서는 28본의 신칸센이 운행 중이었지만 탈선한 차량은 한 대도 없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사고를 일으키는 KTX와는 차원이 다르다. 결국 이런 국력의 총화가 대지진에도 불구하고 일본을 든든하게 지탱하는 힘인 것이다.

 일본의 오피니언 리더들은 대지진의 복구보다도 오히려 그 과정에서 분출하는 내셔널리즘의 향방을 화제로 삼았다. 일본의 도처에는 지금 ‘힘내라 일본!’이라는 구호가 난무한다. 방송과 신문에도 그런 공익광고가 넘쳐난다. 내셔널리즘은 두 가지 방향으로 전망할 수 있다. 첫째는 국민의 역량을 국가 부흥에 집중하는 수단으로서 활용하려는 경향이다. 이런 내향적 내셔널리즘은 때마침 지난해부터 학교교육에서 강조하기 시작한 ‘국가와 향토에 대한 사랑’과 절묘하게 결합해 일본 사회를 한층 더 폐쇄적인 분위기로 만들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인접 국가와의 대립이 고조될 수도 있다.

 둘째는 대지진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원을 정직하게 받아들여 우호협력을 강화하는 길이다. 외국의 지원은 일본의 국력에 비해 미미하겠지만 어떤 나라도 혼자 살아가기는 어렵다는 소중한 진실을 일깨워 주었다. 일본은 그 메시지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사회를 좀 더 개방적인 분위기로 바꿔갈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이 열린 내셔널리즘 쪽으로 기울면 인접 국가와의 긴장은 완화될 수 있다.

 일본과 한국은 지금 역사 인식과 독도 영유권 문제를 둘러싸고 갈등을 빚고 있다. 지난 3월 말 검정에 통과한 중학교 교과서 중에는 ‘통감부가 근대화 정책을 추진했다’든가, ‘독도가 일본의 고유영토인데 한국이 불법 점거하고 있다’는 식으로 기술한 것도 있다. 역사 인식과 영토주권은 내셔널리즘의 근간을 이루는 요소다. 교과서 기술에서 보듯이 일본의 일각에서는 역사 인식과 영토주권을 내셔널리즘을 고양시키는 호재로 활용하려는 움직임이 꿈틀대고 있다. 여기에 잘못 휘둘리면 한·일 관계는 틀림없이 아주 나빠진다. 대지진을 계기로 일본이 좀 더 도량(度量)을 갖춘 금도(襟度) 있는 국가가 되어 한·일 관계를 개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기대한다.

정재정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