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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언론, 정권, 재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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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조윤제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

인간사회는 원래 힘있는 자들에 의해 다스려지는 것이다. 정치의 본질은 힘에 의한 지배다. 외부의 침략과 내부의 소요로부터 국가사회의 안정을 지키기 위한 병력과 치안력은 정치권력의 핵심적 기반이다. 정권을 잡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폭력집단을 장악하고, 징세와 행정권을 행사함으로써 사회를 다스리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체제가 민주화되면서 정보와 여론을 주도하는 언론이 주요 권력으로 등장하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결합하면서 시장을 지배하는 기업과 부가 새로운 권력으로 성장하였다. 이 세 권력이 견제하면서도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면 국가가 안정되고 번성할 수 있으며, 그렇지 못하면 사회가 불안하고 발전이 정체된다.

 건국 이후 우리나라에서 이 세 권력의 상대적 관계는 많은 변화를 거쳐왔다. 정치권력은 늘 언론과 기업을 지배하려 했다. 그러나 언론이 정치권력에 눌려 비판적 기능을 제대로 못하면 정치는 자만에 빠지고 사회는 부패하게 된다. 대기업이 정권과 유착해 지원과 혜택을 주고받는 데 몰두하면 공정경쟁 기반은 무너지고 시장경제는 궁극적으로 활력을 잃게 된다. 권언유착, 정경유착이 부정적인 말로 쓰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군부독재 시절에는 언론과 기업이 정권에 의해 압도되었고, 기업은 정권에 의해 보호 육성되기도 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정권의 힘은 상대적으로 크게 위축되었고, 언론과 기업, 특히 대기업군을 형성하고 있는 재벌의 한국사회에서의 영향력은 크게 확대됐다. 외환위기는 이러한 관계의 변화에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 관치금융이 종식되고, 기업의 재무구조가 강화되며, 경제자유화가 확실히 자리 잡게 됨에 따라 기업들은 더 이상 정권에 생존을 의존하지 않게 되었다. 반면 정치는 잦은 선거와 치열한 정당 간의 경쟁으로 기업의 후원금과 자금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재계는 광고 수주를 통해 언론에, 연구비와 각종 지원을 통해 학계, 사회지도층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어찌 보면 오늘날 한국사회는 재벌이 여론을 주도하고 정치권력을 압도하는 상황이 돼있다.

 이 세 권력은 한국사회를 이끌어가는 실질적 권력이다. 이 세 권력 간에 건강한 견제와 균형이 있으면 우리 사회는 건전한 발전을 지속할 수 있다. 반면 삼자 사이의 유착이나 심한 갈등은 국가의 정책과 사회의 흐름을 왜곡하기 쉽다. 이번 정부는 언론·재계와의 거래를 통해 정권의 성공을 도모하려 했다. 종합편성채널을 내세워 언론과 거래하고, 금산분리완화, 출자총액제도폐지 등을 통해 재계가 원하던 것을 주고 그들의 협력을 얻고자 했다. 그 덕택인지 첫 3년간 언론은 정권에 대한 객관적 비판에 스스로 눈을 감았다. 재계는 이를 시장경제체제에서 당연한 정책이라 반기며 정부를 칭송했다. 이것이 현 정권이 한국사회의 흐름과 국민생활의 실상, 그리고 민심의 소재에 대해 착시 현상을 갖게 된 요인 중의 하나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종편 선정이 끝나고, 정부가 물가잡기를 위한 기업 팔 비틀기, 동반성장을 들고 나오면서 정권과 언론, 재계의 밀월관계가 식고 지금 집권여당은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다시 삼자 간의 힘겨루기와 긴장관계가 시작된 것이다. 어찌 보면 이는 정상적 관계로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힘겨루기에도 절제가 필요하다. 그것이 지나치게 되면 국가제도와 정책의 왜곡을 낳기 쉽다. 언론이 정권과 겨루기 위해 여론을 잘못 끌고 가면 국가제도와 정책이 왜곡되고 그 피해는 궁극적으로 모든 국민들이 보게 된다. 집값이 오르면 올라서, 내리면 내려서 민심이 떠났다는 식으로 비판하는 것은 곤란하다. 지난 정권에서도 언론과 정권의 힘겨루기가 결국 지난 정부의 경제· 대북정책을 좌파정책·퍼주기로 몰았고, 이에 편승한 당시 야당인 현 집권 여당은 지난 정부와 차별화된 정책을 택하다 보니 정권 초기에 지나친 친대기업, 대북강경 기조를 취하게 됐다.

 건전한 균형과 절제를 지키는 삼자의 관계는 국민을 위해 중요하다. 재벌의 영향력 확대는 견제돼야 한다. 그러나 정치적 표 계산이나 국민정서에 기댄 대응이 아니라 시장경쟁제도의 정립에 의해 이뤄져야 한다. 그리고 정부의 힘이 좀 강해질 필요도 있다. 1987년 이후 정치적 민주주의가 경제적 민주주의보다 더 빠르게 진행되면서 한국의 민주주의는 금권정치로 흐를 가능성을 안고 있다. 요새 권력분산 개헌 얘기들을 하나 오히려 건전한 국가발전을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강한 정부가 될 수 있는 개헌이 필요해 보인다.

조윤제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