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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 해결하지 못하면 테러와의 전쟁 이길 수 없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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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호 06면

자유와 평화는 결코 공짜로 주어지지 않는다. 21세기 첫 독립국이자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젊은 나라인 동티모르의 조제 하무스 오르타(62·사진) 대통령은 이 말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인도네시아와 호주 사이에 위치한 작은 섬나라 동티모르에선 20여 년에 걸친 독립운동과 내전으로 2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중앙SUNDAY가 만난 사람 조제 하무스 오르타 동티모르 대통령

하지만 해외에서 오랜 망명 생활을 하던 오르타 대통령은 한순간도 “원수를 미워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인도네시아 군대의 강제 점령으로 조국의 산과 들은 피로 물들었지만 그는 비무장 민간인에 대해선 어떠한 보복 테러도 거부했다. 대신 국제 사회에는 인도주의, 동티모르 사람들에겐 형제애를 호소함으로써 독립운동을 이끌어 나갔다. 노벨상위원회가 1996년 동티모르 가톨릭 교회 지도자인 카를로스 시메네스 벨로 주교와 함께 오르타에게 노벨평화상을 안겨준 이유다. 두 사람의 노벨상 수상을 계기로 국제 사회가 참혹한 동티모르의 인권 상황을 주목하게 됐고, 그로부터 3년이 지난 99년 인도네시아 군대가 동티모르에서 철수했다. 다시 3년 뒤인 2002년 5월 20일 동티모르는 마침내 독립 국가를 이뤄냈다.

오르타 대통령을 지난 3일 동티모르 수도 딜리의 대통령궁에서 만났다. 오르타 대통령은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서 “오사마 빈 라덴이 죽은 것은 기쁜 소식이지만 테러리즘과 극단주의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가난을 해결하지 않고선 ‘테러와 전쟁’에서 궁극적인 승리는 있을 수 없다”며 “가난은 테러리즘이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게 하는 비옥한 토양이 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서방 선진국들은 테러의 배후기지로 의심되는 지역일수록 가난을 없애고 교육 수준을 높이도록 경제적 지원을 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3일 동티모르 수도 딜리의 정부종합청사 앞 광장에서 열린 시계탑 건립 기념식 모습. 롯데백화점이 만들어 기부한 것이다.

그는 동티모르 초대 정부에서 외무장관과 총리를 거쳐 2007년 국민의 직접선거로 2대 대통령에 뽑혔다. 2008년 반대파의 저격을 받아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간신히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티모르해 석유·가스전에 국제적 관심
-오는 20일이면 동티모르 독립과 건국 9주년을 맞는다. 동티모르의 상황은 어떤가.
“2002년 독립 후에도 심각한 내부 갈등과 혼란이 있었지만 지금은 매우 평화롭다. 정치적인 긴장도 없고 경제도 순조롭게 발전하고 있다. 교육과 보건에 대한 투자도 확대하고 있다. 유아 사망률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등 각종 보건·사회지표에서 엄청난 성과가 있었다. 내년의 독립 10주년 기념식은 성대하게 치를 수 있을 것이다.”

-동티모르는 1인당 소득이 500달러를 약간 넘어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 속한다. 경제발전 계획은.
“티모르해의 석유와 가스전 개발에서 나오는 수익을 ‘석유기금’이란 명목으로 적립해 나가고 있다. 정부는 석유기금에서 나오는 이자 등으로 도로·교량·항만·공항 등 전략적 인프라에 집중 투자한다. 하지만 주택 건설이나 주거환경 개선 등 민간부문 개발사업까지 정부가 책임지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따라서 외국인 투자가 절실한 상황이다. 한국도 동티모르 투자에 더욱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

동티모르는 한국의 강원도보다 약간 좁은 국토(1만4600㎢)에 110만 명이 살고 있다. 오랜 세월 독립운동과 내전을 거치면서 대부분의 인프라가 파괴되는 아픔을 겪었다. 수도 딜리에서도 시내를 조금만 벗어나면 50년대 한국의 판자촌을 연상케 하는 열악한 주거 지역을 쉽게 볼 수 있다. 대다수 주민은 허물어져 가는 벽체에 슬레이트 지붕을 얹고 창문도 없이 생활한다. 저개발 농업국으로 커피 수출이 전체 수출의 98%를 차지한다.

하지만 동티모르와 호주 사이에 있는 티모르해는 석유·천연가스 등 에너지 자원이 풍부해 국제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한국가스공사 등 한국 기업 9곳은 코리아 컨소시엄을 구성해 티모르해 가스전 개발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최근 세계 정세를 어떻게 보나.
“세계 테러리즘의 상징이었던 빈 라덴이 죽었다. 10년 전 9·11 테러의 희생자들에게 마침내 정의가 실현된 것이다. 빈 라덴의 죽음은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한다’는 말이 변치 않는 진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진정한 세계 평화는 아직 멀었다.”

-무슨 뜻인가.
“‘테러와 전쟁’은 무기를 들고 싸우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누군가를 원망하며 테러리즘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건강한 환경에서 교육받을 기회를 주는 것이 진정으로 ‘테러와 전쟁’에서 승리하는 길이다. 따라서 서방 선진국들은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 같은 나라를 도와줘야 한다. 제대로 교육받고 가난을 이겨낸 사람들은 테러리스트들이 꾀는 ‘지하드(성전)’를 믿지 않을 것이다.”

오르타 대통령은 49년 포르투갈인 아버지와 티모르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75년까지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동티모르에선 포르투갈어를 공용어로 쓰고 주민의 대다수가 가톨릭 신자다. 화폐는 미국 달러를 공용으로 사용한다.
 
롯데, 시계·PC 기부로 글로벌 공헌
3일에는 한국에서 동티모르 사람들에게 특별한 선물이 도착했다. 롯데백화점이 딜리의 정부종합청사 앞 바닷가 광장에 설치한 9m 높이의 대형 시계탑이다. 동티모르에선 시계가 부의 상징이 될 정도로 시계를 가진 사람이 드물다는 점에 착안해 ‘시간’을 선물한 것이다.

이날 오전 9시 시계탑 앞에선 조제 루이스 구테레스 부총리와 서경석 주동티모르 한국 대사, 학생 등 300여 명이 참석한 기념식이 열렸다. 동티모르 국기의 세모 모양을 본뜬 삼각형 시계탑엔 이 나라를 상징하는 커피콩과 악어를 형상화한 조형물을 달았다. 롯데백화점 손을경 마케팅팀장은 “이 시계탑은 태양열발전을 이용해 별도의 전기공급이 필요 없고 바닷바람에 부식되지 않도록 강화유리와 코팅 소재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롯데는 지난해 ‘동티모르에 시간을 나누어 주세요’라는 캠페인으로 고객들에게서 모은 중고 손목시계 3만여 개와 중고 컴퓨터 100대, 의류 5200점, 라면 1500박스 등도 한국대사관을 통해 동티모르 사람들에게 전달했다. 이 회사 정승인 상무는 “단순한 금전적 기부를 벗어나 동티모르 어린이들에게 시간의 소중함을 알려 주고 꿈과 희망을 나눠주는 자리였다”며 “우리보다 어려운 나라에 도움의 손길을 전하는 글로벌 사회공헌 활동으로 한국의 이미지를 높여 나가겠다”고 말했다.
오르타 대통령은 “이 도시에 아름다움을 더하는 훌륭한 랜드마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완공된 시계탑을 본 소감은.
“공사 중에는 어떤 시계탑을 세우나 하고 상당히 궁금했다. 완공된 모습을 보니 매우 아름답고 훌륭한 예술 작품이란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멋진 시계탑을 선물해준 한국민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동티모르 사람들에게 ‘시간’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던데.
“사회 발전은 시간에 맞춰 부여되는 질서를 지키는 것에서 시작한다. 한국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고 시간 관리도 잘한다고 알고 있다. 안타깝지만 동티모르에는 시간을 잘 지키도록 훈련받은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이런 점에서 한국이 준 시계탑은 동티모르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한국에도 여러 번 방문했다.
“한국은 우리에게 모든 면에서 모범이 되는 나라다. 한국에는 석유나 가스, 금이나 다이아몬드 같은 천연자원이 거의 없다. 하지만 땀과 열정·애국심으로 다른 나라들이 부러워하는 부자나라가 됐다. 한국에 갈 때마다 한국 사람들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열심히 일하는 모습 등을 보면서 큰 감동을 받았다. 앞으로 경제협력 등을 통해 한국과 동티모르가 더욱 가까운 나라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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